② 5·18 ‘교도소 공격’은 계엄군의 왜곡
5·18단체 등은 이번 유골발견 사건을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해 5·18이 40주년을 맞은 상황에서도 북한 개입설이나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같은 왜곡과 폄훼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새로 발굴된 군 내부문건과 관련자 증언 등을 토대로 5·18 당시 암매장의 진실과 신군부의 5·18 왜곡·폄훼 상황을 재조명했다. 〈편집자 주〉
[40주년 5·18] 광주교도소 암매장과 5·18 왜곡의 진실을 캔다②
5·18 ‘교도소 병력배치요도’ 40년만에 확인
신군부, 8년 후 시민 사망지점 지우며 왜곡
희생자들, 귀가하다 광주~담양도로서 피격
광주교도소, 최근 미확인 유골 261구 발견
전두환, "시민들 집요하게 교도소 공격"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 쓴 내용이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는 5·18 당시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을 “폭도”라 하며 ‘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해왔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북한이 광주에 있는 고정간첩망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라는 북한군 개입설도 담겨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이란 5·18 나흘째인 80년 5월 21일부터 무장한 시민군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이다. 신군부 측에서 5·18이 폭도에 의한 소요사태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근거로까지 악용해온 사례이기도 하다.
교도소 공격하다 사망?…담양 가던 민간인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계엄군이 '피격지점'이라고 표기한 지점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제 계엄군이 "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한 80년 5월 21일 오후 7시30분에는 광주교도소 앞에서 4명이 총격을 당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당시 공수부대에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하던 담양 주민으로 확인됐다. 담양에 있는 집에 가려다 계엄군에게 희생된 민간인이 훗날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둔갑한 것이다.
광주교도소, 장갑차까지 배치된 철옹성
앞서 5·18 직후인 80년 6월 작성된 국보위 보고서에는 정작 ‘교도소 습격’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 청문회 때 함께 공개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는 시민들 피격지점을 삭제함으로써 되레 교도소 습격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했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교도소 습격사건이 나중에 신군부가 꾸며낸 허위 사실임을 밝히는 핵심 증거가 40년 만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문서에 남은 병력배치 현황도 교도소 습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장갑차 등 핵심 병기와 버스·유조차 같은 차단막을 교도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집중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의 이날 작전 자체가 교도소 방어가 아닌 광주~담양 간 도로를 차단하는 데 맞춰졌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보고 있다.
높이 5m 담장엔 사격선수 출신 저격병
김희송 교수는 “옛 광주교도소는 5m 높이의 외곽 담장으로 둘러싸인 데다 저격병까지 배치돼 시민들의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라며 “광주교도소가 습격을 받은 곳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방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진창일 기자, 이근평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