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도소 생존자 "16일간 52명 사망···매일 쪽지에 기록"

중앙일보

입력 2020.05.17 05:00

업데이트 2020.05.17 11:41

③ '유골 발견' 교도소에서 숨져간 시민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최근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과 5·18과의 연관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광주교도소는 80년 5월 당시 광주시민이 계엄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암매장을 당한 곳이어서다. 광주시는 지난해 12월 발견된 유골들과 5·18 행방불명자와의 유전자 대조를 위해 행불자 가족의 혈액채취 신청을 받고 있다.

[40주년 5·18] 광주교도소 암매장과 5·18 왜곡의 진실을 캔다③
생존자 강길조씨 “52명 숨진 것 봤다”
16일간 광주교도소 끌려가 고문·폭행
가마니에 쌓인 시신…“암매장 가능성”

5·18단체 등은 이번 유골발견 사건을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올해 5·18이 40주년을 맞은 상황에서도 북한 개입설이나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같은 왜곡과 폄훼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새로 발굴된 군 내부문건과 관련자 증언 등을 토대로 5·18 당시 암매장의 진실과 신군부의 5·18 왜곡·폄훼 상황을 재조명했다. 〈편집자 주〉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오른쪽은 시민들에 대한 고문·폭행이 이뤄진 옛 광주교도소 전경. 중앙포토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오른쪽은 시민들에 대한 고문·폭행이 이뤄진 옛 광주교도소 전경. 중앙포토

“본 것만 52명…바를 정(正)자로 셌다”

“눈동자라도 돌리면 담뱃불로 눈가를 지지거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쳤다. 송장 가마니가 쌓인 곳에서 밥을 먹는데 상처 난 부상자들에게는 새카맣게 파리가 붙었다.”

 5·18 때 광주교도소에 구금됐다 풀려난 강길조(77)씨는 40년 전에 겪은 일을 회상하며 몸서리를 쳤다. 강씨는 80년 5월 18일 전남대에서 시위를 하는 학생을 돕다가 계엄군에게 붙잡혀 광주교도소에 구금됐다. 그는 구금 16일 동안 갖은 가혹행위와 폭행을 당한 끝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옛 광주교도소는 지난해 말 신원미상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5·18 행방불명자와 연관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씨는 “당시 계엄군들은 부상을 입은 채 교도소로 옮겨진 시민들에 대한 치료는커녕 무자비하게 폭행해 목숨을 앗아갔다”며 “호주머니에 있던 쪽지에 바를 정(正) 자로 죽어 나간 사람 수를 일일이 적었는데 내가 구금된 기간에만 52명이 숨졌다. 매일 새벽 헬기가 도착한 소리가 나면 시신이 가마니에 싸여 실려 나갔다”고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목숨이 붙은 시민들은 온종일 폭행을 당했다. 구금된 공간은 교도소 수감자들이 외부로 납품하기 위해 만든 가마니를 쌓아두는 창고였다. 이 창고에서는 장교들과 부사관, 병사들이 번갈아 가며 무기와 주먹을 휘둘렀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 끌려가 계엄군에게 갖은 고초을 겪은 끝에 풀려난 강길조(77)씨가 80년 5월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br〉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 끌려가 계엄군에게 갖은 고초을 겪은 끝에 풀려난 강길조(77)씨가 80년 5월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br〉

온종일 폭행…반항하면 잔혹한 고문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은 온종일 손이 뒤로 묶이고 무릎을 꿇린 채 지냈다. 강씨는 “눈동자라도 돌리면 담뱃불로 지지거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렸다”며 “대검으로 팔을 긋는 바람에 상처가 점점 벌어져 노란 고름이 흥건한 사람을 그대로 방치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폭력에 반항한 시민에게는 더욱 심한 가혹행위가 돌아왔다. 계엄군은 자신들의 매에 못 이겨 목숨을 잃은 시신은 창고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당시 경상자와 중상자별로 줄을 세워놓은 창고 맨 구석에는 가마니로 덮어놓은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들은 시위에 참여한 시민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전라도 ⅩⅩ들 400만, 다 없애버려도 괜찮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강씨는 “시위에 가담한 시민군 진압 작전을 나갔다 온 날은 폭행이 더욱 심해졌다”며 “계엄군들은 (진압작전에 대한) 화풀이를 하기 위해 연행된 시민을 향해 대검과 소총 개머리판, 진압봉 등으로 마구 두드려 팼다”고 말했다.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중앙포토]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중앙포토]

창고 구석엔 시신 덮인 가마니 

 그는 “작전에 나갔다 온 한 계엄군이 대검으로 머리를 툭 치니 살갗이 벗겨져 나갔다. 과다출혈로 숨진 이들이 많았다”며 “한 시민은 온몸에 17발의 총상을 입고 교도소에 도착하자마자 숨졌다”고 증언했다.

 매일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지자 상당수 시민들은 목숨을 잃었다. 강씨는 “새벽녘 헬기 소리가 나면 계엄군들이 가마니에 쌓인 시신을 들고 나갔다”며 “누군가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주머니에 있던 종이쪽지와 펜으로 죽은 사람들 수를 적었다”고 했다.

 강씨는 “당시 교도소에서 숨진 사람들을 계엄군들이 정확히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며 “시신을 들고 나간 뒤로는 이후 과정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만큼 이번에 발견된 미확인 유골이 당시 숨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했다.

 전남방직 근로자였던 강씨는 5·18 때 공수부대원을 피해 도망가는 대학생을 차에 태워 인적이 뜸한 골목길로 대피시켰다고 한다. 이후 시위대와 군인이 대치하고 있던 전남대 사거리로 향했다가 계엄군들에게 붙잡혀 문흥동 광주교도소로 옮겨졌다.

 강씨는 “당시 손을 뒤로 묶인 채 군용트럭에 실려 교도소로 옮겨졌는데, 차가 흔들릴 때마다 뒤엉키면서 중상자들이 바닥에 깔려 밟혀 죽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민들, 교도소 가던 차량서 밟혀 죽기도

 그는 “교도소 이송 전에도 계엄군들은 주소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사람과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친 시민 등 3명을 소총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폭행해 숨지게 했다”며 “교도소에 도착하자 트럭 4~5대로 실려 온 시민 중 이미 10여명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망자 대부분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계엄군은 시신을 물로 씻거나 전투화 발로 대충 닦아낸 뒤 일련번호를 쓴 표지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난해 12월 교도소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들과 5·18과의 연관성에 대한 조사와 함께 군 당국의 자료 공개를 촉구했다. 그는 “계엄군이 당시 교도소에서 숨진 시신의 사진을 찍고 일련번호도 매기고 했으니 육군본부나 국방부에는 관련 기록이 있을 것”이라며 “40년 전 사라진 실종자들을 하루빨리 찾아 달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진창일·최종권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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