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임원들은 전원사퇴 한다는데, 임원님들 고개 숙이고 다니세요. 책임 통감은 하십니까?”
이달 초 실적 발표가 끝난 A 대기업. 직장인 전용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인 블라인드에는 경영 부진을 지적하는 이 기업 직원들의 글들이 올라왔다. 23일 오전 현재 이 글들은 3000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이 기업 직원(약 2만6000여 명) 중 상당수가 글들을 읽은 셈이다. 수십 개의 댓글엔 실적 악화 책임을 직원에게 돌리는 듯한 경영진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⑦ 직장인 대나무 숲, 블라인드를 말한다
블라인드는 사내 갑질이나 비위가 회사 밖으로 알려지게 하는 고발의 성격이 강했다. 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 조현아 부사장의 ‘땅콩 회항’,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에 대한 ‘미투’폭로, 두산인프라코어의 ‘신입사원 명퇴’ 등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건 상당수가 블라인드를 통해 알려졌다.
최근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한창수 대표의 장남이 이달 초 운항부문 직원으로 입사한 일이 알려진 것도 블라인드가 신문고 역할을 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2017년 이미 일반관리직으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 블라인드엔 "둘째 아들 일반직 취업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카드회사 다니던 첫째 아들까지 운항 인턴으로 급하게 일정 당겨가며 채용시켰다"고 적혔다.
절대 비밀인 부서별 성과급도 공유
최근 삼성전자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다. 최근에는 고발뿐 아니라 정보와 의견교환의 창구로도 활용된다. 회사 규모가 큰 삼성전자 등에선 “사업부별 PS 정리 완료” 등의 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기도 한다. 알음알음이야 알 수 있겠지만, 사업부별 PS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블라인드에서는 이 내용 역시 가감 없이 공개되고, 공유된다. 옆 동네(경쟁 업체)의 성과금도 공개돼 비교 대상이 된다.
한진 상황 구한말에 빗댄 게시글도
'회사서 손톱깎이' 등 사내 꼴불견 해소에도 일조
최근 한 대기업 계열 IT 회사의 블라인드에는 ‘남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 ‘여자 직원의 제일 꼴 보기 싫은 점 10가지’란 글이 올라왔다. 글에서는 ‘회사에 와서 손톱을 깎거나’, ‘회사에서 큰 소리로 집안일 관련 전화를 하는 일’ 등이 남자 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들로, ‘하이힐로 지나치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다니는 것’이 여자직원의 꼴 보기 싫은 점으로 꼽혔다.
이 회사 관계자는 “그 글 덕분인지, 최근엔 사무실에서 손톱을 깎거나 양치질을 하는 남자 관리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며 “마찬가지로 여직원들 역시 조심하는 게 눈에 보인다”라고 전했다.
침소봉대나, 직원 간 ‘저격 글’ 등은 부담
블라인드를 통해 같은 회사 직원을 공격하는 ‘저격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 경우 누가 글을 쓴 것인지 심증이 있더라도 이를 밝혀내 처벌하는 것은 어렵다. 공연히 ‘블라인드 사찰’ 시비 등이 생길 수 있어서다. 부적절한 사내 연애 등 직원 개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글이 올라와도 기업으로선 손을 쓰기 어렵다. 급여나 처우 등을 경쟁사와 직접 비교하는 글들도 뼈아프다.
그래서 재계 10위권의 한 대기업은 블라인드 가입에 필요한 본인 인증용 회신 e메일 계정을 한동안 스팸으로 처리해 블라인드 가입을 저지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블라인드는 직장인 전용 앱인 만큼 가입을 위해선 회사 계정의 e메일을 통한 본인 인증이 필요하다.
회사 지지 글도 많아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를 통해 기업과 그 구성원 간 정보격차가 자연스레 해소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라며 “블라인드를 통해 ‘사내 갑질’이나 ‘채용 특혜’ 같은 잘못된 기업 관행이 외부로 알려지고 이런 관행이 개선되어 간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만 하다”고 평했다.
블라인드 말고 자체 익명 게시판 도입도
회사를 상대로 직접 말하기 어려운 요청이 해결된 경우도 있다. 사내 어린이집 입소권 우선순위 대상에 ‘맞벌이 부부’ 뿐 아니라 ‘싱글대디와 싱글맘’ 등을 넣은 일이 대표적이다. 사옥 엘리베이터 운영 로직을 바꿔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줄인 것도 이 게시판에 나온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익명성 보장과 모바일 기능을 통해 활발한 사내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며 “익명성만 철저히 보장한다면 회사와 임직원 간 신뢰가 쌓이면서 그만큼 불필요한 감정 낭비도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수기ㆍ이소아 기자 lee.sook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