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세찬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자동차·조선·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은 원천 기술을 가진 선진국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후발주자 사이에 '넛 크래커(nut-cracker·낀 처지)가 될 위기에 몰렸다. 북핵, 중동 불안, 미·중 무역분쟁 등 지정학적 위기는 이런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 총수에겐 선진국 등의 '밑그림'을 받아 사업하던 선대 창업자의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비바람을 헤쳐나가기 위해 주요 그룹 총수는 직접 밑그림을 그리며 변신 몸부림을 하고 있다. 조직 문화부터 사업 방식까지 확 바꾸고 있다. ‘제2의 창업’하는 심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창업자의 2~4세인 대기업 총수의 바뀐 리더십을 소개한다. [편집자]
생존하라, 위기의 5대그룹 신리더십 (1)
현대차그룹이 변신하고 있다. 변화의 핵은 취임 14개월을 맞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다.
‘불도저식’ 현대 속도는 현대차그룹을 세계 5위의 완성차 업체로 키웠다. 하지만 이른바 ‘‘C.A.S.E(커넥티드·자율주행·공유·전기차)’ 격변을 맞아 최근 수년간 그룹은 휘청거렸다.
미래 그림의 완성
정 수석부회장이 ‘제2의 창업’이라 부를만한 변화에 나선 건 이런 배경에서다. 더 이상 뒤처지면 생존이 어렵다는 절박함에서 비롯했다. 지난해 10월 현대차그룹은 2010년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10%를 넘나들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1%대로 주저앉았다. 미래 차 분야에서도 뒤처졌단 평가가 내려졌다. 외부에선 “현대차그룹이 반등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나왔다.
그룹 관계자는 “이미 지난해 초, 그 이전부터 고질적인 중국의 과잉생산, 과도한 미국시장의 인센티브(판매촉진비), 악성재고 등의 문제를 해결해 왔다”며 “이런 손실을 반영한 게 지난해 3분기 실적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느꼈던 것처럼 충격적인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 수석부회장이 2019년 이후를 이야기한 건 오히려 미래 차 대비에 늦었던 시간을 ‘캐치 업(따라잡기)’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했다.
과거 그룹의 주력이었던 ‘정공 라인(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정공 출신의 경영진)’이 사라졌다. ‘재경 라인(현대차그룹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재경부문 경영진)’은 재편됐다. 내연기관·기계 전문가 대신 정보기술(IT) 전문가가 대거 영입됐다. "앞으로의 과제는 소프트웨어의 강화"라는 정 수석부회장이 고민이 묻어 있다. 삼성전자 출신 지영조 전략기술본부장(사장), KT 출신 서정식 최고정보책임자(CIO·전무), 네이버 출신 딥러닝 전문가 김정희 상무 등이 대표적이다.
가속 붙은 ‘뉴 현대 속도’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던 미래 차 분야에서도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다. ‘동남아의 우버’로 불리는 그랩에 투자하고 중국 바이두와 협업 중이다. 러시아 최대 포털사이트 얀덱스와 로보택시 시범사업에도 나섰다. 자율주행 분야 ‘어벤저스’로 평가받는 테크 스타트업 오로라 이노베이션에 전략 투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차 그룹의 미래 준비가 너무 더딘 게 아니냔 비판이 나왔다.
핵심 부품 계열사 현대모비스는 라이다(LiDAR·레이저를 이용해 물체의 양감(量感)을 측정하는 자율주행 핵심 센서) 분야 세계 1위 업체인 미국 벨로다인에 600억원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하기도 했다.
언어가 달라졌다
정의선 리더십의 핵심은 현대가(家)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시류(時流)를 정확히 읽는 데 있다. 선대의 리더십이 ‘나를 따르라’ 식의 거친 ‘속도’였다면, 정 수석부회장의 ‘속도’는 방향과 힘을 모두 갖춘 디테일이 더해졌단 의미다.
지난달 22일 정 수석부회장은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임직원과 ‘타운홀 미팅’이란 이름으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그는 “미래 현대차그룹은 자동차가 50%, 개인용 비행자동차가 30%, 로봇이 20%인 회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타운홀 미팅을 지켜본 전문가 평가는 후한 편이다. 무엇보다 정 수석부회장의 ‘언어’가 달라졌다는 게 주목할 만하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타운홀 미팅이나 최근 뉴욕 특파원 간담회 등을 보면 정 수석부회장의 ‘언어’가 확실히 달라졌다”며“모빌리티 변혁의 최신 트렌드를 충분히 이해하고 학습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고 센터장은 “과거의 ‘현대 속도’ DNA 덕분에 현대차그룹은 수압(水壓)이 매우 높은 조직이었다. 문제는 지난 5년 동안 물꼬를 터주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정확한 방향과 힘으로 물꼬를 터주면서 ‘잃어버린 5년’의 답답함이 해소되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조직문화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남성스러움''딱딱함' 등 현대차를 지배했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지난 여름 현대차그룹 양재동 사옥에는 반바지나 빨간 바지 차림의 직원도 등장했다. 복장 자율화 반년 만에 정장 일색이던 그룹이 스타트업 같은 복장으로 바뀌었다. 직급체계를 간소화하고 보고나 결재, 회의 방식도 바뀌었다. 그룹 소속 C매니저(옛 부장 이하 직급)는 “1년 전과 비교하면 실제 ‘일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경청과 소통의 리더십
정 수석부회장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경청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한국 재계 2·3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캐릭터”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크로스 체크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문제를 제기하면 바로 피드백하고, 제3자의 견해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게 정의선식 소통 방식”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 수석부회장 리더십의 가장 긍정적인 면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권한 위임)’”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노동의 시대가 끝나고 아이디어와 혁신의 시대가 되면서 권위적이고 무서운 리더에겐 혁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어렵다”며 “이런 권한 위임이 과거 현대차그룹에 없던 문화란 점에서 바람직한 리더십”이라고 평가했다.
‘뉴 현대 속도’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변화는 점점 가속이 붙었다. 변화는 내부와 외부를 모두 향한다. 신속하고 정확하다. 또 효율적이면서 실용적이다. 지난해 수석부회장 취임 전까지 산업의 시류 변화를 충분히 고민하고 경청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의사결정 구조도 달라졌다. 지영조 사장을 중심으로 한 전략기술본부가 미래 전략을 수립하고 투자 방향을 설정하면, 그룹의 원래 주력이었던 재경 인력이 크로스 체크하는 구조다.
익명을 요구한 그룹 내부 관계자는 “미래 투자가 시급하다 해서 한 쪽으로 쏠리면 그룹의 재무 상황이 악화할 수 있는데, 최근엔 전략기술본부의 제안을 내부에서 점검해 절충안을 내놓는다”고 전했다. 그는 “과거엔 잘못된 방향으로 과도한 투자를 하거나 너무 보수적인 판단으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안과 점검, 실행까지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시류를 읽는 것의 ‘깨달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지난 5월 칼라일그룹이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할아버지(고 정주영 명예회장)와 살았는데 매일 아침 5시 할아버지의 기상 시간에 맞춰 아침 식사를 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수차례 ‘시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당시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의미를 약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카마겟돈 시대, 생존할 수 있을까
자동차 산업은 사상 초유의 격변을 맞고 있다. 이른바 ‘카마겟돈(자동차와 ‘종말’을 의미하는 아마겟돈의 합성어)’ 시대를 맞아 생존하는 회사와 사라지는 회사가 갈리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산업 안팎의 평가다. 정의선 수석부회장도 지난달 타운홀 미팅에서 “자동차 시장은 이미 공급 과잉 상태이고 미래 자동차 업계에서 사라지는 회사가 많아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뉴 현대 속도’를 장착한 현대차그룹은 미래에 생존할 수 있을까. 앱티브와의 제휴로 거대한 ‘합종연횡’의 물길에 합류하긴 했지만 아직 변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항구 한국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차는 덜 팔리고 미래 차 R&D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데 진짜 제휴를 하려면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 한다. 현대차는 아직 줄 것이 많은 회사가 아니다”고 말했다.
정의선 리더십의 방향성은 옳지만 미래 차 변혁에 뒤처진 지난 5년을 단숨에 따라잡긴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임은영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다운 사이클’이 시작됐을 때 변화하는 조직이 잘 적응하는지가 중요하다”며 “글로벌 산업 수요가 더 줄어드는 내년 이후 정의선 리더십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발휘될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