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향미(손담비)의 한 마디에 노규태(오정세)는 사르르 녹아내린다. 옹산 바닥에서 혼자만 고급 양주를 시켜먹을 수 있는 재력가에 차기 옹산군수를 꿈꾸며 부지런히 마을 대소사를 쫓아다니는 야심가지만 평소 ‘존경’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받아본 적 없는 탓이다. 집에서는 잘난 변호사 아내(염혜란)에 눌려 기도 못 펴고, 밖에서는 술집 카멜리아 사장인 동백(공효진)이에게 무시당하는 서글픈 신세다. 그런데 카멜리아 알바생 향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니 마음을 뺏길 수밖에.
하지만 사람 팔자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 마을 내 노규태가 활개 칠 수 있는 ‘노규태존’은 점점 좁아지고, 노규태는 발을 디딜 수 없는 ‘노(No)규태존’은 점점 넓어진다. 덴마크로 탈출을 꿈꾸며 1억을 모으고 있는 향미에게 코가 꿰여 눈에 띄기만 하면 모텔비도 내주고 비행기 표도 대줘야 하는 ‘현금인출기’ 신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오고 간 것은 아이크림과 수상스키 티켓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혼전문변호사인 아내에게 바람 피운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으니 안 그래도 작은 마음이 더욱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이다.
[민경원의 심스틸러]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
차기 군수 꿈꾸지만 현실은 ‘노땅콩’
‘극한직업’ 테드창 잇는 코믹 캐릭터
악역까지 못하는 것 없는 미드필더
지난달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차영훈 PD는 ‘동백꽃 필 무렵’을 축구로 치면 4-4-2 포메이션으로 비유했다. “넷 만큼의 멜로, 넷 만큼의 휴머니즘, 둘 만큼의 스릴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옹산 FC의 미드필더는 단연 오정세가 아닐까. 그는 멜로ㆍ휴머니즘ㆍ스릴러에 모두 지분이 있을뿐더러 이 드라마에서 가장 공수전환이 빠른 인물이니 말이다. 한순간에 멜로를 코믹으로 만들고, 코믹을 스릴러로 전환하는 것은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네이버TV에 올라온 메이킹 영상을 보면 동료들의 고백도 쏟아진다. 촬영 도중 애드립을 쏟아내는 오정세의 모습을 보며 한 스태프가 “실생활이랑 연기가 별로 차이가 없다”며 칭찬하자 강하늘은 “그게 진짜 최고의 연기다. 연기를 잘 한다는 말도 안 나오는 경지”라고 맞장구친다. 그가 순발력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다. 쉴 새 없이 캐릭터를 분석하며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안면인식장애와 무대와 카메라 공포증이 있음을 고백한 그는 “순간의 감정으로만 연기하기엔 겁이 나서” 먼저 준비하는 쪽이다.
나왔다 하면 웃음을 유발하는 덕에 ‘코믹 전문 배우’로 오인당하기도 하지만 실은 스릴러에서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악역 장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를 본 시청자라면 그의 사람 좋은 웃음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기억할 터. 극 중 치밀하게 보험사기를 계획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 ‘조작된 도시’(2017)에서 선보인 악역 민천상과도 결이 다르다. 전자가 생활감이 물씬 묻어나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거세된 감정을 한순간에 폭발시킨다. 두 작품 모두 그가 배우로서 가진 잠재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다작 비결을 묻는 말에 우스갯소리로 “(출연료가) 싸니까”라고 답한 적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존경심’에 오정세라는 배우를 모셔가지 않을까. 존경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어떤 역이든 찰떡같이 소화할 것임을 알기에 말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