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당선 양진영씨 "만학도의 때늦은 주행…계속 달릴 것"

중앙일보

입력 2019.09.23 00:01

수정 2019.09.2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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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된 양진영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제20회 중앙신인문학상의 주인공들이 선정됐다. 문학평론 부문은 양진영씨의 '제의가 대신할 수 없는, ‘너’의 원한 -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문학평론 34편의 응모작을 대상으로 예·본심을 치른 결과다. 1958년 광주 출생인 양진영씨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석사 졸업했고,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이다. 당선 소감과 심사평, 당선작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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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당선 소감

 
 문학에 국한하면, 나는 세 분을 사사(師事)해 왔다. 김수영 시인은 “지게꾼을 묘사하지 말고 지게꾼이 되라”고 가르쳐 내가 참 문장을 찾고 쓰도록 도왔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이라는 명제를 주어 내가 사회 규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회에서 유용하게 받아들여진 것을 부정하도록 이끌었다. 특정 규범에 편입된 예술가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거나, 그런 모순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늘 사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적 안목을 키우려 힘쓰는 중이다. 김현이 던진 이른바 ‘무쓸모의 쓸모’는 내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문학은 써먹을 수가 없다니? 예술가는 자신이 쓴 작품의 무쓸모를 감내해야 한다니······ 나는 한동안 그, 둔중한 언어의 질감에 눌려 지냈다.
 이제, 나는 이들의 언술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다. 덕분에 무용할 것 같은 창작, 비평이지만, 그것들에 여전히 몰입 중이고 그러다보니 만학임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김현의 가르침을 체득할 때까지 계속 달릴 것이다. 
 그런, 만학도의 때늦은 주행을 이해하고 낙점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먼저 감사드린다. 이분들 덕분에 평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서강대학교 국문학과의 우찬제 지도교수님, 이상란, 김경수 교수님들께 인사드린다. 이분들의 배려로 나는 요즘 개안(開眼)의 희열을 맛보는 중이다. 더불어 세대의 벽을 넘나들며 플라토닉 우정을 나누는 학우들 -  윤준민, 오은정, 정세인, 그리고 수료하신 임보람, 안아름, 박인성, 서보호, 양정현, 염수민, 조자영 – 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 기쁨은 긴 여로를 함께해 온, 노모, 아내 허경예, 두 딸 은지, 선지, 동생 인숙에게 바친다.
 

평론 심사평 

 
 평론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심사였다. 평론이라는 글쓰기 장르가 해체되고 재편성되는 작은 현장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평론은 지금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가고 있는 듯하다. 기존의 형태로 더욱 소수자의 글쓰기가 되거나, 블로그와 SNS 등의 자유분방한 글쓰기 속으로 스며들고 번져나가는 것. 이를테면, 매우 적은 평론과 매우 많은 (감상)평이 공존하는 방식. 생산적인 변화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으나 그 징후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총 34편의 응모작 가운데 비평적 시각과 논리, 구성력을 갖춘 글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우리를 폐기하는 우리 – 김이듬론', '소외와 공감, 그 경계의 감성 – 최은영 소설', '우리, 실패 박람회장에서 만나 – 박상수론'은 문장력과 기본기를 갖추고 있으나, 작품에 개입하고 작품을 풍부하게 재구축하는 비평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미흡함이 있었다.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텍스트를 장악하는 방법에 관한 탐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반면, '죽은 인간이여, 신화가 되어라 – 박형서 소설의 성범수 활용법'은 패기와 자신감 넘치는 화법으로 시선을 끌었다. 초기 소설의 인물 ‘성범수’를 변주・확장해 박형서 소설 전체에 대입한 방식이 신선했다. 문제는 이 독법이 박형서 소설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좀 무리한 것이어서 간혹 과도한 주장과 감정적인 어조가 돌출되는 데 있었다.    
 '제의가 대신할 수 없는, ‘너’의 원한 -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애도되지 못한 원한의 윤리성, 원한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 애도 행위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주목한다. 아우슈비츠 피해자로 자살한 장 아메리의 이야기에 많이 기대고 있고, 정교한 문장과 치밀한 논리 전개 등에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지만, 기존의 평론들과 다른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점을 응원하기로 했다. 정진을 바라며 문운과 건승을 빈다.
 
※평론 본심 진출작 (5편) 
 
김민정 '죽은 인간이여, 신화가 되어라-박형서 소설의 성범수 활용법'
양진영 '제의가 대신할 수 없는, '너'의 원한-한강의 『소년이 온다』' 
양진호 '우리, 실패 박람회장에서 만나-박상수론'
성현아 '우리를 폐기하는 우리-김이듬론'
신용성 '소외와 공감, 그 경계의 감성-최은영 소설'


예·본심 심사위원=김수이

 

평론 당선작

 

제의가 대신할 수 없는, ‘너’의 원한 - 한강의『소년이 온다』  

 
그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시쳇더미를 치울 때만 화해가 가능하다. 
-장 아메리,『죄와 속죄의 저편』
 
지하 묘지의 유령들
 
 아우슈비츠의 피해자였던 장 아메리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는 가해자인 독일과 독일 국민을 용서하도록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다. 전후의 수많은 홀로코스트 기념비와 추모 집회, 배상금 같은 사회적 제의도 그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 그는 가해자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제삼자에 의한 화해가 정의로 포장되는 현실을 내면화할 수 없었다. ‘집단적 죄’라는 담론 속에서 실제 고통을 당한 피해자에 대한 치유는 미루어진 채 가해자들이 명예롭게 늙어가는 독일에서 아메리의 원한은 해소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윤리적인 원한도 있다고 했다. 고문으로 탈구된 팔이 기억하는, 자신의 원한은 정당하다고 했다. 아메리가 끝내 자살한 이유는 자신 앞에 놓였던 시쳇더미를 치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체들이 유령이 돼 자신의 마음속에 지하 묘지를 만들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령이  『소년이 온다』에서도 등장한다.
 5·18에서 중학생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30여 년이 지나서도 지갑에 품고 다니는 사진을 보며 “······ 동호야.”(192) 하고 부른다. 군인들의 총에 맞은, 어린 아들의 시신을 청소차에 싣고 가서 묻은 어머니, 울지도 않고 “뗏장 옆에 쪼그려 앉아서 풀을 한 움큼 삼켰다가 토하고, 다 토하면 또 풀을 삼켰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잊을 리 없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뿐인 어머니, 두려울 것도 후회될 것도 없는 어머니는 소복을 하고 “그 군인 대통령이 온다고, 그 살인자가 온다.”(188)는 승용차를 가로막는다. 어머니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찢어지고, 졸도하면서 울부짖는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189)  
 이런 어머니의 가슴속 묘지에 살아 있는, 아들의 유령은 기념관이나 추모식 같은, 집단적 제의로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 스스로 그 유령을 마음의 지하 묘지에 살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령은 어머니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 유령을 잊으면 어머니에게 삶은 더는 지고의 가치가 아니다. 아메리가 그랬듯이 어머니는 쉽게 몸을 포기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사라지게 하는 것만이 가슴속 유령을 지우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애도에 실패한 어머니의 푸닥거리를 의혹의 시선으로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그럴듯한 건축물과 행사로, 이제 그의 원한은 위로받았다고, 서둘러 마무리 지어서도 안 된다. 장 아메리의 생애와 그의 원한을 애도하지 못한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어머니들이 스스로 가슴속 묘지를 허물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들의 원한을 외면하고, 대신에 거대한 집단적 제의로 그들의 애도를 끝내려 한다면 우리는, 훗날 위안부 소녀상 같은 기념물을 다시 세워야 할지 모른다. 『소년이 온다』는 이런 어머니들의, 또한 그들처럼 원한과 유령을 가슴속 묘지에 두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너’로 되살아난 소년
 
 총 7장으로 구성된 『소년이 온다』는 각 장에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1장(어린 새)에서 화자는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돕던 중학생 소년, 동호를 ‘너’로 호명하며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기 전날까지 동호의 모습을 그려낸다. 2장(검은 숨)은 동호의 친구로 계엄군의 총격에 숨진 정대의 유령 화자가 등장해 자신의 시신이 불태워질 때까지 내뱉는 독백이다. 정대의 혼이 향하는 청자는 동호로 정대의 독백은 시위대의 본거지였던 도청에서 맞게 될 동호의 최후를 암시한다. 3장(일곱 개의 뺨)은 3인칭 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호와 한조로 도청에서 사체를 수습했던 그녀, 김은숙은 이후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군부독재 시절에 자행된 검열 때문에 고통받는다. 4장(쇠와 피)의 화자인 ‘나’는 5·18 당시 교대 복학생으로, 함께 체포돼 10년 후 자살하는 김진수에 대해 회고한다. 그 과정에서 동호가 도청에서 항복하고 나오다 억울하게 살해됐음이 밝혀진다. 5장(밤의 눈동자)에서는 도청에서 동호와 함께 싸웠고 이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린 미싱사, 임선주가 2인칭 ‘당신’으로 등장한다. 이 장은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선주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해달라는 윤 선생의 요청에 갈등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6장(꽃 핀 쪽으로)은 항쟁 후 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동호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어머니의 회상이다. 마지막 에필로그(눈 덮인 램프)에서 작가적 서술자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까지의 과정을 절제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이 소설에서는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소년이 각각 ‘나’와 ‘너’로 표현된다. 1장에서 초점화된 ‘너’, 동호 소년은 이어지는 장들에서도 지속해서 호명되기 때문에 전체 서사의 중핵으로 기능한다. 동호는 2장에서 죽은 정대의 진술을 통해 죽음이 암시되고, 3장에서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4, 5장에서는 학살의 현장을 담은 사진 속의 주검으로, 6장에서는 엄마의 회고 속에서, 에필로그인 7장에서는 소녀의 진술을 통해 끊임없이 그 존재를 드러낸다. 1장은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서술자가 스토리 밖에 있는 경우로 ‘너’라는 기호를 ‘그/동호’라는 3인칭으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도 작가는 구태여 2인칭 화법을 사용해 ‘너’와, ‘너’를 부르는 ‘나’ 사이의 관계의 끈을 강조하고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살아남은 ‘나’들이 사용하는 ‘너’라는 용어는 당시 도청에서 싸우던 동호 소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소년을 ‘동호’로 부르면 그는 화자들의 마음속에서 박제화된 상태로 35년 전의 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라고 부르는 순간 소년은 망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자신을 부르는 ‘나’라는 존재와 관계하는, 현재의 인물로 되살아난다. ‘나’들이 수십 년간 동호를 ‘너’로 불러왔다면 그는 어머니가 시신을 “청소차에 싣고 가서 몰래 묻었다.”(181)는 공동묘지에 묻혀 있지 않다. 동호는 갇혀 있던 “베니어판 관”을 뚫고 나와 ‘나’들의 가슴속 지하 묘지에 안치됐으며 ‘너’로 불릴 때마다 튀어나와 실체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되살아난다. 살아남은 어머니, 누나, 형들이 동호를 ‘너’로 부르는 행위는 무의식적, 무의도적이므로 자신들의 몸이 숨 쉬는 동안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속 지하 묘지에 안치해 둔, ‘너’라는 시쳇더미를 치울 수 없어 끝내 자살한 장 아메리를 떠올려야 한다.  
 소설의 중간중간에 잊을 만하면 소년을 ‘너’로 표기해 뭔가를 환기하는 작가의 의도를 짚어 보자. 2인칭 서사는 주인공이 2인칭 대명사로 불리면서 서사의 대상이 되는 소설이다. ‘나’라는 서술자가 등장하는 1인칭 서술이나 ‘그/그녀’로 표기되는 3인칭 서술과 달리 ‘당신’ 혹은 ‘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주체가 되는 상황은 ‘당신/너’가 지시하는 대상이 모호한 경우가 많아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2인칭 서술은 작가가 어떤 서사의 지향점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도에는 미학에 대한 고려도 있지만 특정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작용한다는 점이 2인칭 서술의 특징으로 꼽힌다. 실제로 2인칭으로 서술된 소설들 가운데는 5․18과 같은 국가적 재난 사태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이렇게 보면 『소년이 온다』 역시 서술자가 어떤 의도로 ‘당신/너’라는 2인칭 서술을 고집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시선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 ‘나’와 짝패를 이루는 ‘너’라는 기호가 소설의 지배소임을 알 수 있다.
 
① 그날부터 너는 그녀들과 한조가 되었다. 은숙 누나는(···) 선주 누나는(···) 진수 형은 너를 처음 보고 놀라며 물었다. 너, 1학년 아니냐? 여기 일은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 (1장: 15~16쪽. 밑줄은 인용자 주)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 (···) 동터오는 거리를 더듬어 너와 내가 살던 집으로 어른어른 나아갈 수 있겠지. (···) 그때 너는 죽었어.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 네가 죽은 순간만을 나는 느꼈어. (2장: 63~64쪽.)
 
③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 간 뒤에. (3장: 102쪽.)
 
너 누구냐, 어디서 왔어. (…)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너무 졸려요. 조금만 잘게요, 여기서 형들이랑. (···)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는 죽이진 않을 거야. (4장: 111~112쪽.)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 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5장: 172~173쪽.)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6장: 192쪽.)
 
 인용문에서 ‘너’가 가리키는 대상은 모두 동호인 반면, 그를 부르는 ‘나’는 장마다 다르다. 2장에서 ‘너’를 부르는 ‘나’는 동호가 찾아 나섰던, 죽은 친구 정대다. 3장, 4장, 5장의 ‘나’는 모두 그날 상무관에서 ‘너’와 함께 있었던 형과 누나들 - 은숙, 교대 복학생, 진수, 선주다. 6장에서 ‘너’를 애타게 부르는 화자는 동호의 어머니다. 이렇듯 ‘나’와 ‘너’로 지칭되는 관계는 서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관계보다 가까워 보이는 효과가 있다. 화자와 수화자의 거리가 무화돼 동일한 시공간에 놓인 인물로 느껴진다. 그/그녀 등 3인칭은 타자화된 어감인데 반해 ‘너’라는 2인칭은 30년 전에 죽은 동호를 인격화해 현재성의 인물로 만든다. ‘너’라고 호명되는 순간, 동호는 박제를 벗어나 ‘너’를 부르는 ‘나’와 한 시공간에 머무는 존재가 된다.  
 동호를 ‘너’라고 부름으로써 현재로 소환한 ‘나’들은 5·18에서 동호와 함께 싸우다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을 서술자로 내세워 ‘너’를 호명하는 행위는 오래전에 죽은 ‘너’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재의 ‘우리’와 함께, 지금 이곳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 환원시키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처럼 『소년이 온다』에서 2인칭 대명사, ‘당신/너’는 ‘너’와 조응하는 ‘나’라는 인물을 부각해 둘을 하나의 감정 공동체로 묶는 효과를 낳는다. 동호가 ‘너’로 불리는 한 그는 죽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여전히 수많은 ‘나’와 함께 여기에서 살고 있는 실존적 실체다. 그래서 소설의 기저에는 이유 없이 희생된 ‘너’에 대한 회한과 애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책이 두텁다. 소설의 표면에는 그 반동으로 분출한 멜랑콜리와 원한이 무성하다.  
 
멜랑콜리가 만든 묘지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용된다. 애도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mourning)와 멜랑콜리(우울증, melancholia)를 구분한다. 우울증의 특징은 자기 비난, 망상적 죄책감, 자살적 행위 등인데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들도 유사 증상을 보인다. 남성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성적인 수치심을 경험한 대학생, 진수는 출소한 뒤 십여 년 만에 자살하고, 어린 나이에 성인과 똑같이 가혹한 고문을 당한 영대는 여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동호 어머니는 어떤 방식으로 30년의 멜랑콜리를 인내했을까? 어머니의 애도 작업을 자크 데리다는 “죽은 자를 마음 안에 살아있도록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가슴에 지하 묘지를 만들어 동호를 거기에 안치시키는 방식이다. 그 마음의 묘지에서 동호는 죽은 자, 즉 유령이 아니다. 수시로 30년 전의 사진을 꺼내 “······ 동호야.”(192) 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의식에서는 살아 있는 실체다. 만일 마음속 지하 묘지에서 아들을 떠나보내면 어머니는 죽은 몸이다. 즉 그 묘지는 어머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만든 장치다. 데리다는 애도 작업에서 유령을 마음 안에 살게 하는 것은 결국 주체가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애도 전략은 데리다의 논리와 유사하다. ‘너’의 유령의 실재 여부와 관계없이 죽은 자를 수시로 부르는 것이 그들의 애도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그런 방식을 통해서만이 진수처럼 자살하지 않고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5·18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은숙은 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 동호야.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102)고 소년을 호명하며 살아간다. 은숙이 편집한 희곡을 상연하는 연극배우들은 당국의 검열로 삭제된 대사 -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100) - 를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전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만으로는 동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지도, 자신의 멜랑콜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발작적으로 거리로 뛰쳐나가 격한 푸닥거리에 가담한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5·18 유가족들에게 푸닥거리는 분노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동호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격렬한 푸닥거리 양상이 드러난다. 소복 차림으로 “살인자가 탄 승용차”를 가로막고 서서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189) 울부짖는 어머니, 옷은 찢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몸은 길바닥에 드러누운 어머니를 그려 보라.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 묘지에 숨겨둔 유령을 버리지 않는 한 푸닥거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멜랑콜리를 극복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어머니들의 진혼 의식을 지나치다고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차고 넘치는 집단적 위로에도 불구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한 장 아메리의 생애를 되새기면서 우리는, 개인적 원한이 사회적 제의와 추모 행사로 치유될 수 있다고 예단해서도 안 된다. 아메리가 그랬듯이 위안부 할머니들도 가슴속 시쳇더미를 치울 때만 가해자와 화해가 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5·18 피해자들이 스스로 시체를 덮을 때까지, 그 재난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닌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다.  
 
집단적 제의의 함정
 
 그런데, 많은 논자는 이 소설의 정조를 개인의 치유보다는 시대 정신적 입장에서 해석해 왔다. 동호, 정대, 자살한 진수 등 증언의 주체가 되어야 할 5·18 당시의 주역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대한 초기 비평은 증언 (불)가능의 문제에 천착했다. “죽지 못한 치욕과 그 치욕에 관한 증언 불가능을 강조함으로써 광주의 참상을 재현했다”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이런 관점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의 재현을 공론화한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에 기대고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참된 증인은 증언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며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대리인으로서 의사 증언한다. 『소년이 온다』 역시 유령 화자인 정대를 등장시키고 살아남은 인물들이 동호를 대신해 증언하고 있어 어느 정도는 증언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기억의 재현은 위성적 주제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중핵적 주제는 피해자들의 원한 표출과 그것에 대한 애도로 보인다. 이를 명징하기 위해 “가라앉은 자들만이 진정한 증인”이라는 프리모 레비의 고백에 기대어 보자. 그가 보기에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람들만이 인간성의 말살을 온전히 경험했었다. 레비는 자신이 나치 멸절 수용소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레비처럼 구조된 자들인 은숙, 선주, 교대 복학생은 증언을 요청하는 윤 선생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한다. 그들의 내면이 증언의 필요성이나 가치와 공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게는 증언이 낳을 사회적 울림에 앞서 개개인의 치유가 절실하고, 절박했음이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① 김진수가 어떤 이유로 이 사진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왜 유서 곁에 이 사진이 놓여 있었는지 내가 이제 추측해야 합니까? 여기 직선으로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에 대해 선생에게 말해야 합니까?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132쪽.)
 
②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35쪽.)
 
③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 들어 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166쪽.)
 
①, ②는 4장에서 교대 복학생이 자살한 김진수에 대해 증언을 요청하는 윤 선생에게 주는 대답이고, ③은 5장에서 선주가 노동운동 전력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 여성으로서 상상할 수 없이 잔혹한 고문을 당했던 경험을 증언할 수 없다고, 윤 선생에게 항변하는 말이다. 구태여 레비의 증언에 기대지 않고도 죽은 자들이 겪었던 공포와 고통을 살아남은 자들이 온전히 되살리기는 불가능하다. 5·18 당시 10대 초반의 소녀였던 작가의 글쓰기를 제노사이드의 생생한 증거물로 받아들일 독자도 드물 것이다. 유령 화자로 등장한 정대와 소설의 중핵으로 기능하는 동호에 주목하면 전체적인 서사는 증언의 재현 가능성보다는 억울하게 학살된 어린 학생들을 추모하는, 애도의 글쓰기로 읽힌다. 작품의 해석을 사회적, 공익적 차원까지 확대해 미학적 가치를 제고하는 일은 문학의 위상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그전에 작품의 내적 서사구조에 주목해, 인물들이 내포한 정조와 그를 통해 작품이 표방하는 미학을 등한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주체적 입장에서 보면 “『소년이 온다』는 폭력과 야만으로부터 존엄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계속되어온, 인류의 무수한 투쟁의 계보 속에서 읽혀야 할 텍스트”라는 언술은 문제적이다. 질 들뢰즈의 정동이론에 기반을 둔, 이런 해석들은 문학의 내적 의미망보다는 사회적 기여와 역할에 관심이 많다. 이 때문에 문학을 특정 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이나 시대 정신적 도구로 보는 데 익숙하다. 이들이 기대는 정동은 타자에 의해 촉발되고 그것에 의해 생성, 변화하는 과정으로, 일개인에게 고착된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서 흐르고 발현되는 감정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소설에 나타나는 고통, 분노, 죄책감 같은 정동들은 각각의 ‘몸’에 속해 있지만 다른 ‘몸’과의 마주침의 결과다. 정동은 언제나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므로 이때의 ‘몸’은 더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 감정으로 설명된다. 그 결과 5·18을 거대한 정동 네트워크의 환유로 보게 되고 개인의 고통과 분노에 대한 인지는 축소된다.  
 이런 입장은 소설에 나타나는 정동을 사건과 인물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소설에서 인물들이 드러내는 분노가 독자에게 전이돼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까지 연대하게 할 여지는 있다. 정동은 특히 5·18과 같은 제노사이드 상황에서 군중이 보이는 집단의식과 행동을 설명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대량학살 피해자들의 개별적 분노와 원한은 공동체 우선의 구호에 함몰될 위험이 있다. 그것은 집단적 제의나 기념행사를 우선시하는 사회가 빠져들기 쉬운 함정임을 직시해야 한다.
 
원한의 윤리성
 
 처음으로 돌아가 이 소설의 주된 정조인 원한을 되짚어 보자. 원한은 흔히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감정으로 간주하지만아메리는 원한의 감정에는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윤리적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원한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아메리는 원한의 부정은 과거에 대한 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원한을 ‘노예의 도덕’으로 보는 니체를 비판한다. 원한을 품게 된 사람이 공동체 안으로 되돌아와 사회에 포섭되려면 그 사람의 내면에서 원한을 야기한 과거의 갈등이 해소돼야 한다는 논리다. 아메리가 직시한, 사회의 화합과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손쉽게 개인의 상처가 잊히는 현실, 그리고 그것의 대항 수단으로서의 원한의 윤리성이 『소년이 온다』에서도 엿보인다.
 소설의 5장에서 선주는 함께 노동운동을 하는 성희 언니에게 “내가 그들을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151)라고 심경을 드러낸다. 1장에서 유령 화자인 동호는 손녀의 시신을 앞에 두고 체머리 떠는 노인을 보며 “용서하지 않을 거다. (···)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45)라는 독백으로 원한의 감정을 드러낸다. 수치스러운 성폭력을 경험한 진수는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진통제, 수면제, 술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원한을 접고 자살한다. 막내인 동호를 잃은 가족들의 정서 역시 지극한 원한이다. 어머니는 군인 대통령이 광주에 올 때마다 길목을 막고 서서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189)하고 소리를 지르고 작은형은 두 눈에 핏발이 서서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182)라고 맹세한다.  
 이런 장면은 아메리가 말했듯이 피해자의 원한을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치부가 드러나고 그 사회가 정당화된다는, 원한의 윤리성을 환기한다. 『소년이 온다』의 여섯 개장에서 피해자로 등장하는 화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들의 이야기는 문학적 진상규명보다는 치유되지 못한 분노와 원한의 표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작가의 애도적 글쓰기임이 분명하다. 30년간 동호의 유령을 가슴속 지하 묘지에 품고 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수많은 홀로코스트 작품들이 막지 못했던 장 아메리의 죽음을 상기해야 한다. 광기 어린, 어머니들의 푸닥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갑게 한”(190) 그 가슴속 유령이 떠날 때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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