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호 변호사
누구에게나 삶은 인연 맺기의 연속이다. 인연끼리 이로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인연도 세월이 흐르면 멀어진다. 20대에 검사가 돼 29년을 보냈으니, 수없이 많은 인연이 만들어졌으리라. 이제 대부분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또렷한 것은, 그 후 전직 대통령이 수사받거나 추징금을 못내 집이 공매되는 일이 이어졌기 때문일까.
노 전 대통령과 첫 대면을 한 것은 1995년 11월 대검 중수부 특별조사실에서였다. 2년반 전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던 사람이 조사받으러 온 것이다.
피의자 자리에 앉혔지만 경력 18년차 검사에게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의 무게 못지않게 범죄혐의도 무거웠다. 5000억원이라는 비자금 규모도 엄청났지만, 돈을 건넨 30대 재벌 총수들을 모두 불러 조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죄상을 낱낱이 파헤치라는 험악한 여론의 분위기도 수사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런 중압감을 극복하려면 빈틈없는 법리 구성과 단단한 증거 확보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 전직 대통령은 검찰이 손댈 수 없는 성역이다 보니, 조사하는 시늉만 하다가 돌려보낼 거라고 세간에서는 쑥덕거렸다. 그런 만큼 기선의 제압이 중요했다. 14시간의 조사가 끝난 후 자정 무렵, 승용차 뒷좌석에 타며 쓰러지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될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법의 길 9/4
기소 이후에도 계좌 추적에 박차를 가해, 비자금의 사용처 규명에 매진했다. 사돈과 친척, 그리고 기업인들에게 맡겨둔 돈과 함께, 부동산 매입에 들어간 돈도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2600여억원의 뇌물 금액 거의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는 재산을 묶어둘 수 있었고, 형(刑)의 사면 이후 추징금 집행 단계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연희동 사저는 온전할 수 있었다.
검사 시절 범법을 단죄하며 맺은 인연을 모두 이롭게 했는지 묻는다면, 대답이 망설여진다. 응분의 죗값을 치르고 나서도 새로운 삶을 찾지 못하고,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사저의 평온이 지켜지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했으니, 인연을 이롭게 했다고 말해도 될까.
문영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