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싸움은 피할 수 없다면 이겨야 한다. 나라 간 싸움은 더욱 그렇다. 이기려면 똘똘 뭉쳐야 한다. 편을 가르면 진다는 걸, 동네 애들도 안다. 오합지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밖과 싸우자며 안을 때리는 건 다른 뜻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조국이 누군가. 이 정부 핵심 중 핵심이자 보수 정권 시절 『진보집권플랜』을 쓴 좌파의 최고 전략가 아닌가.
집행하기 어려운 판결을 놓고
비판=매국으로 몰아가는 건
민주 독재 인증하겠단 뜻인가
다시 역지사지해보자. “사법부의 판결은 존중돼야 한다”는 그의 말은 백번 맞다. 하지만 집행력을 가졌느냐는 별개다. 신용=의사+능력이다. 아무리 빚을 갚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능력(돈)이 없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 맞는 판결이라도 집행 대상이 미국·중국·북한·일본 같이 센 나라라면 우리의 사법 의지대로만 할 수는 없다. 하물며 국내 판결도 김경수 경남지사 구속 판결이 잘못됐다며 해당 판사를 탄핵하자던 게 현 집권 세력 아닌가.
또 역지사지해보자. 네 가지 경우다. ①반일 애국단체가 소송을 냈다. ‘경제 침략의 죄를 물어 아베 총리를 탄핵하라.’ 한국 사법부가 ‘보편적 세계 경제 질서 위반’이라며 탄핵을 결정했다. 이건 어떻게 집행하나. ②일본 사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벌금 1억엔을 선고했다. 안 내고 버텼더니 주일 한국 대사관 재산을 압류한다고 한다. 눈 뜨고 고스란히 뺏겨야 하나. ③롯데가 중국의 사드 보복 피해 보상 소송을 냈다. 한국 법원이 중국 정부에 2조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누가 어떻게 받아올 것인가. 안 주면 전쟁이라도 할 건가. ④6·25 전쟁 피해자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억원씩 배상 판결이 났다. 어느 간 큰 정부가 집행할 것인가.
①~④의 판결이 이뤄지고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조 전 수석의 ‘원리주의적 판결 지상주의’에 맞춰 극단의 가정을 해봤을 뿐이다. 이 네 가지를 대한민국이 다 할 수 있다면, “죽창을 들자”는 그의 말을 나는 100% 따를 것이다. 맨 앞에서 머리띠를 둘러메고 뛰어나가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의 죽창과 반일, 편 가르기는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빠르게 망가뜨리는 정치공학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제껏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산다고 생각해왔고, 이 둘을 한 번도 분리해 본 적이 없다. 민주 없는 자유가 어디 있으며, 자유 없는 민주가 어디 가능하랴고 믿어왔다. 요즘 들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자유와 민주,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100% 자유 쪽이다. 의견이 다르다며 친일·매국의 굴레를 씌워 척결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 독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정부가 지난 세월 물리치고자 싸워왔다던 바로 그 괴물, 독재인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