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전전하다 취업 못해…파산 교육선 “무조건 쓰지마라”

중앙일보

입력 2019.07.18 00:02

수정 2019.07.18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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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법정에 선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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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2층 법정. 파산 선고를 기다리는 130여 명이 판사가 입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법원이 고용한 파산 관재인(管財人)은 재판 시작 전 “은닉 재산이 발견되면 면책을 받을 수 없다”며 주의사항을 알렸다. 파산 신청자 사이에서는 염색을 한 20~30대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걸면 고개를 숙인 뒤 피했다. 권영세(58)씨는 “보일러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운영하다 은행 대출이 막혀 법인과 개인 모두 파산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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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파산 선고는 15분 만에 끝났다. 채무자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재판 이후 바로 신용 회복 교육이 이뤄졌다. “파산 신청자로 금융 불이익이 없어지는 5년 뒤를 대비해 주거래 은행 1곳을 만들어 꾸준히 신용을 회복하라” “가장 중요한 건 ‘무조건 안 쓰는 것’” 등의 내용이다. 강사로 나선 이선인 신용회복위원회 서울중앙지부장은 “고용 없는 성장이 경기 불황의 원인”이라며 “물가는 오르는데 자영업자 매출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학자금 2000만원 빚지고 출발
경제력 없어 은행 대출 못받고
고금리 2·3금융권으로 몰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줄어들던 개인 파산·회생 접수 건수가 올해 증가세로 돌아섰다. 20대 파산 접수 건수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최근 5년간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17일 법원행정처의 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5월 개인 파산 접수 건수는 1만9193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8.6% 증가했다. 개인 파산 접수 건수는 2009년 11만917건에서 2018년 4만3397건으로 지속해 떨어지다 올해 1월부터 전년 동기 대비 늘어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연령별로는 20대 파산 접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청년 경제 활동을 연구하는 시민단체 내지갑연구소가 법원행정처로부터 2013~2018년 연령별 파산 현황 자료를 받은 결과 20대 파산 접수 건수가 지난 5년간 29.1% 증가했다. 60대가 8.9% 증가로 그 뒤를 이었다. 30대~50대는 파산 접수가 20~30%씩 오히려 감소했다. 70세 이상도 5.4% 줄었다.
 
한영섭 내지갑연구소 소장은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통해 취약 계층 소득을 늘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20대와 60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고 있다”며 “20대는 재무 건전성이 떨어지다 보니 흙수저와 금수저 간 차이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사무국장은 “경제 능력이 없는 20대는 취업 기간도 길어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고 제2~3 금융권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많다”고 설명했다.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 회장은 “20대는 학자금이나 생활비로 2000만원 이하 빚을 많이 진다”며 “당장 눈앞에 진 빚을 갚아야 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기회를 놓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경찰이 공개한 휴대폰깡 증거물. 급전이 필요한 20대가 주로 피해를 당한다. [뉴스1]

법원의 법인 파산 통계에서도 불황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올해 1~5월 전체 법인 파산 접수 건수는 397건으로 전년 대비 21% 증가했다. 지난 9일 법인 파산 면담을 신청하러 서울회생법원을 찾은 김모(56)씨는 “10여 년간 식자재 공급 업체를 운영하다 최근 경쟁에 밀려 사업을 접었다”며 “대기업이 투자는 안 하고 중소업체 먹거리만 빼앗으려 하니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역별로 서울회생법원(197건)·수원지방법원(50건)·대전지방법원(29건)·인천지방법원(25건) 등 순으로 대도시와 수도권 쪽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창원지방법원(19건)이 전국 5위를 차지한 점이 눈에 띈다. 창원지법 관계자는 “대형 제조업체에 하청을 받는 중소업체 파산이 많아지다 보니 접수 건도 많아졌다”며 “전담 부서 2개, 판사 5명이 파산 업무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호 창원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액화천연가스(LNG)선 주문으로 대기업 경기는 올해부터 나아지고 있지만 중국의 저가형 선박 공세에 밀려 중소업체는 아사 직전”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조선·자동차 산업 불황에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시행으로 비용 충격을 주다 보니 부산과 울산, 경남(부·울·경) 경기 침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파산 직전까지 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까지 고려하면 불황 체감 지수는 더욱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상·이병준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