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형님②]
지존파 잡은 ‘영원한 강력반장’ 고병천
“반장님. 정말 급한 일입니다. 서초서로 좀 와주십시오”
지옥에서 탈출한 여인
이 여성은 카페에서 광희와 함께 일했던 이영희(가명)씨였다. 앞서 찾아간 경찰서에서 ‘관할이 아니다’며 신고를 접수해주지 않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광희의 도움으로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그녀가 내게 털어놓은 지존파의 범죄 행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싶었지만 이 말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부부를 납치해 창살에 가두고 살해했어요.”
아까 잠복근무 중에 흘려 읽은 중소기업 부부 납치 기사가 떠올랐다. 예삿일이 아니다 싶었다. 서장님께 이 사실을 보고 했다. 지존파의 아지트는 전남 영광. 당시만 해도 관할을 엄격하게 따졌고, 충격적인 일이라 다들 주저했다. 총대를 메야겠다 싶었다.
“하루만 주시면 어떻게든 잡아 오겠습니다.”
서장실을 나와 강력4반 팀원 5명을 모았다. 영희씨에 따르면 그들은 총 5명으로 공기총, 다이너마이트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권총 3정을 팀원들에게 나눠주고 장비를 트렁크에 넣는데 손끝이 떨렸다. 며칠째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외근 좀 갔다 올게.”
한낮에 펼친 지존파와의 사투
“무조건 따라붙어. 절대 놓치면 안 돼!”
강동은은 눈치가 빨랐다. 뒤따라오는 차량을 보자 갑자기 가속페달을 밟았다. 좁은 시골길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과감하게 악셀을 밟아 옆에서 봉고차를 들이받았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봉고차가 옆으로 기울었다. 차를 버리고 도주하는 강동은과 강력반원들이 흙바닥에서 뒹굴었다. 강동은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촉박했다. 나머지 조직원들이 눈치를 채면 큰일이었다. 조직원들을 꾀어내려 파출소에서 다급한 듯 전화를 걸었다.
“강동은씨가 운전 중에 크게 다쳐서 연락 드립니다.”
전화를 받은 건 조직원 김현양이었다. 처음엔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차에 돈다발이 있다는 말에 조직원 문상록과 함께 아지트를 나섰다. 김현양은 조심성이 많았다. 파출소 안으로 문상록만 보내고 본인은 차에서 대기했다. 문상록이 파출소 문을 열자마자 팀원들이 몸을 날려 넘어뜨렸다. 문상록이 거칠게 욕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이 소리를 들은 김현양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미리 대기시켜둔 차량으로 그를 추격했다. 김현양은 주유소에서 자폭할 생각이었다. 차를 바짝 붙여 따라붙자 핸들을 돌리던 김현양의 차량이 담벼락을 들이받고 멈춰 섰다.
이제 남은 건 조직원 강문섭과 백병옥 뿐이었다. 공포탄을 쏘며 아지트로 진입했다. 강문섭은 주저앉아 손을 들었고, 백병옥은 뒷산으로 도망가다가 검거됐다. 지존파의 아지트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산뜻한 벽지를 발라놨지만 오히려 괴기스러웠다. 사제감옥으로 쓰인 지하 공간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전기톱과 피 묻은 헝겊, 쇠창살과 소각장이 눈에 띄었다. 영희씨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피해자가 몇 명으로 늘어났을지 모른다.
조직원들을 모두 붙잡아 서울로 올라오는 데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서초서 앞마당은 기자들로 빼곡했다. 외신기자들도 보였다. 쏟아지는 질문들과 플래시 세례. 그제야 우리가 지존파를 검거했다는 실감이 났다.
지존파 시신을 묻어준 아내
조사가 모두 끝나고 지존파 조직원 중 몇몇은 내게 옥중 편지를 보냈다. “이제 지존파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용서를 비는 하늘나라파가 되고 싶습니다.” 앞서 성폭행을 저질러 먼저 구속됐던 두목 김기환과 내가 붙잡은 나머지 조직원 5명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피해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과 내 손으로 잡은 그들의 최후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가슴이 착잡했다.
며칠 뒤 출장을 갔는데, 교도소에서 전화가 왔다. 문상록의 시신을 아무도 인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렵게 수화기를 들어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아내는 10초 동안 아무말 않다가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문상록의 시신을 직접 거둬 천주교 공원 묘지에 안장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존파 사건이 터졌을 때 세상 모두가 경악했다. 대한민국에 다시는 없을 잔인한 일이라고 했다. 25년이 흐른 지금, 경악스러운 일은 매년 일어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만큼 놀라지 않는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있다. 아내의 부축을 받아 성당에 가면 나는 늘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다시는 이같은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