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명 희생 뒤에야 매뉴얼 지키는 경찰

중앙일보

입력 2019.04.23 00:05

수정 2019.04.23 00:51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이슈추적] 진주 무차별 살인범 <중>

진주시 아파트 방화·살인 참사 현장에 주민 등이 가져온 하얀 국화가 쌓이고 있다. [연합뉴스]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에 잡혀갔는데 얼마 후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비슷한 일이 또 생길까 겁나 폐쇄회로TV(CCTV)를 달았어요.”
 
지난 17일 오전 경남 진주시 한 복지시설 직원은 사무실의 CCTV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안인득(42)은 지난해 12월 한 달가량 이 시설에 출근해 근로 의욕을 고취하는 상담을 받았고, 1월 중순 직원 2명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직원이 커피를 타주자 “마시고 몸에 부스럼이 났다”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조현병 증세였다. 안인득은 불구속 입건됐고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김해·춘천·수원서 정신질환 난동
경찰, 응급입원 조치한 뒤 수사
안인득 땐 7번 신고 받고 4번 수사
병력조회 한 번도 않고 풀어줘

법무부, 보호관찰 종료 안 알리고
병원, 무단 진료 중단에도 무대책
정신질환 사회 감시망 따로 놀아

안인득은 지난 2년 내내 이웃을 괴롭혔다. 경찰에 몇 차례 신고했다. 위층 주민 최모(30)씨는 “경찰이 민원을 접수할 수 없으니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며 “3월 초 대문 앞에 CCTV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CCTV에 안인득의 기이한 행동이 잡혔다. 안인득이 최씨의 사촌동생 최모(18·사망)양을 쫓아와 대문을 두드리고 오물을 뿌렸다. 안인득 위층에서 4건, 옆동 등에서 2건 등 모두 6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이 중 3건만 재물손괴 혐의로 벌금 또는 기소중지 처리됐다.
관련기사
 
‘경찰이 한 번만이라도 안인득의 질병 이력을 조회했더라면 ….’ 22일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한탄했다. 진주에서 5명이 살해된 이후 경찰이 폭력 성향을 보이는 정신질환자를 잇따라 응급입원(3일 강제입원)시키고 있는데, 경찰이 진작 활용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안인득은 2010년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2013년까지 법무부 보호관찰을 받았다. 2011년 6개월 강제입원했고, 2016년 7월까지 외래진료를 받았다. 안인득의 조현병 이력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도 경찰은 3건의 신고는 무시했고 4건의 수사에서 병력(病歷)을 조회하지 않았다. 의료법·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압수수색 영장이 있으면 진료기록을 받을 수 있다. 정천운 진주경찰서 형사과장은 “범죄사실이 있으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압수수색영장을 받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보면 피의자(안인득을 지칭)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범행을 진술했고, 사진·동영상 등 증거를 모두 확보해 압수 영장을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잡혀갔다 금방 풀려난 괴물 … 놀란 주민 CCTV 직접 달았다
 

흉기 난동사건으로 숨진 최모양 집 입구에 가족이 사비를 들여 설치한 CCTV. [연합뉴스]

경찰은 보건소나 정신보건복지센터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응급입원을 활용하지 않았다.
 
경찰만 아쉬운 게 아니다. 안인득이 2011년 치료감호소를 나왔을 때, 2013년 보호관찰이 끝났을 때 법무부는 이 사실을 보건소나 정신보건복지센터에 통보하지 않았다. 2016년 7월 안인득이 치료를 중단했을 때 해당 병원도 챙기지 않았다. 경찰-정신건강복지센터-병원-법무부 4개 축이 따로 놀았다. 지난해 경북 영양군 경찰관 살해,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 사건 때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진주 사건 이후 경찰이 달라졌다. 경남 김해중부경찰서는 협박·특수협박 등 혐의로 김모(39)씨를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고 21일 밝혔다. 김씨는 지난 18일 오후 김해 한 주민센터에서 기초수급자 선정과 관련한 상담을 하다 “관리소장을 죽여버리겠다”며 뛰쳐나갔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아파트 관리소장이 관리비 납부를 독촉하자 지난 16일 오후 4시40분쯤 관리소장을 집으로 불러 흉기를 들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김씨를 긴급 체포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경찰은 김씨의 전과가 없지만 자신과 타인을 해칠 위험이 크다고 보고 응급입원시켰다. 김씨는 경찰에서 “조현병·우울증·공황장애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씨 집에서 정신질환 약봉지를 확보했다. 경찰은 응급입원(휴일은 제외)이 24일 끝나면 보호자에 의한 입원이나 시장이 주도하는 행정입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강원도 춘천경찰서도 지난 20일 춘천시 한 주택에서 개가 짖는다고 쇠파이프로 때리고, 개 주인 A씨(63)를 수차례 폭행한 혐의(특수상해)로 조현병 환자 박모(51)씨를 체포해 조사 중이다. 경찰은 구속영장 신청보다 치료가 급하다고 판단해 21일 오후 박씨를 응급입원시킨 후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도 공업용 커터칼을 들고 길거리에서 소란을 피운 50대 남성이 19일 응급입원됐다. 이 남성은 10여 년 전부터 정신질환을 앓아 왔다고 가족이 말했다고 한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위험성이 있는 환자를 응급입원시킨 것은 바람직하다. 이런 조치를 한 경찰이 비난받거나 민원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게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매년 8시간 정신질환자 대응 요령 교육을 받고, 국공립병원 정신과 전문의가 핫라인으로 연결돼 언제든지 자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응급입원 정신병원을 지정하고, 항상 베드를 비워둔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올 초 국회에서 “정신질환자의 빠른 치료와 자해·타해를 막기 위해서는 정보 연계가 중요하다. 경찰과 의료기관이 복지부·정신건강복지센터를 통해 위험군에 대한 정보를 연계하면 지금보다 훨씬 위험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주·창원=김윤호·이은지·위성욱 기자 kim.you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