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중산층 <상>
지난달 5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센터에서 만난 김순철(61)씨는 이곳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김씨는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고용센터를 처음 찾았다고 했다. 4시간 파트타임 사원으로 근무하던 우체국에서 지난 2월 권고사직됐다. 그는 "1년은 다닐 줄 알았는데, 올해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잘렸다"고 말한다. 많지는 않지만 한 달에 79만원을 받았고, 가족이 여기에 기댔는데 그게 사라졌다. 넉 달 전부터 청소업체에 나가는 아내의 일당 9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당장 24, 28세 자녀의 학자금 대출 상환이 걱정이다. 김씨는 매달 40만~50만원을 갚아 왔다.
김씨는 유통 관련 중소기업에 20년 다녔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성실 덕분에 인력 담당 간부가 됐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방송통신대학를 마쳤다. 순탄하던 김씨에게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이 몰아쳤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막노동·청소 등 안 해 본 게 없다. 근근이 버텼다. 전 직장과 비슷한 업종의 회사에 들어갔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전전하다 지난해 3월에는 이런 데도 어려워졌다.
김씨는 어떡하든 계속 일해야 한다. 아들은 몇 년째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있다. 딸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자녀의 학자금 대출 상환(월 50만원)을 더 미룰 수 없게 됐다. 김씨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나처럼 쉽게 실직할 수 있어 '아무 데나 취직하라'고 말을 못한다”며 “본인들은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담이 커진다. 김씨는 20년 다닌 직장에선 250만원 넘게 월급을 받았다. 지금은 가계 수입이 150만원 정도고, 많아야 200만원이다. 실업급여가 끝나면 대책이 없다.
빈곤층 내몰리는 은퇴 중장년
퇴직 후 파트타임 전전하는데
자녀학자금 대출까지 짊어져
"중산층 진입 기회도 없는 자녀
부양책임 중산층 부모 동반 추락"
김씨는 "중산층(상중하로 나누면 중하)에서 하층(하상)으로 떨어졌다. 과연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재로썬 희망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지난달 5일 서울서부고용센터에서 만난 정태숙(66)씨도 20년 전까진 건설 중장비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월 2000만~3000만원을 벌었다. 외환위기 후 사업이 어려워졌고, 재기를 위해 여러 차례 같은 폐업과 창업을 반복하며 재산을 잃었다. 2000년대 초반 사업을 접은 뒤 닥치는 대로 일한다. 최근에는 일용직으로 일당 12만원짜리 일을 했다. 정씨는 “2년 전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던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지난달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와야 했다”며 “거기서 월 200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는데, 이제 그 정도 받을 곳을 찾기가 막막하다”고 말했다. 30, 34세 자녀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지 못했다. 알바 등으로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정씨는 "아이가 결혼자금이라도 모을 수 있게 학자금 대출금을 월 25만원씩 대신 갚아 준다"고 말한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극심한 취업난으로 2030세대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며 "중산층 진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자식과 이들을 부양하는 추락한 중산층이 하층민으로 동반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추락한 중산층이 재기하려면 양질의 일자리가 해결책이지만 노동시장 유연화, 산업경쟁력 강화 등이 선행돼야 하는데 쉽지 않다”며 “당장 저소득 은퇴 연령에 적은 소득이라도 꾸준히 받을 수 있는 일자리나 맞춤형 복지제도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이에스더·이승호·김태호 기자 sssh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