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컵라면ㆍ건빵 먹으며 심야 재판…검사와 내내 설전

중앙일보

입력 2019.04.0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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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현직 법관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현직 판사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임 전 차장은 “오랜 인연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보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법관 후배를 법정에서 마주한 심경을 밝혔다.  

 
컵라면·건빵 먹으며 심야 재판…증인신문 12시간 넘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부장 윤종섭) 심리로 2일 열린 정다주 부장판사에 대한 증인신문은 오전 10시 30분쯤 시작해 휴정시간까지 포함해 12시간 넘게 이뤄졌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서 임 전 차장 등은 컵라면과 건빵으로 저녁을 먹고 오후 11시 넘어까지 재판을 이어나갔다.

현직 판사 증인 출석
임종헌 "상급자로서 책임느껴"

재판부가 오후 7시쯤 “피고인과 교도관이 식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묻고 담당 교도관이 “식사시간을 놓쳤다. 건빵과 컵라면이 대응식으로 제공된다”고 답하면서 30분여의 짧은 저녁 시간이 주어졌다.
 
법정서 만난 선·후배, 임 "상급자로서 책임감 느껴"
이날 증인으로 나온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임 전 차장 쪽을 보지 않고 증언했다. 임 전 차장 역시 정 부장판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사건 검토 문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사건에 대한 보고서 등을 작성한 의혹을 받는다.
 
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임 전 차장은 정 부장판사의 직속상관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임 전 차장은 정 부장판사에 대한 반대신문을 직접 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반대신문은 피고측 변호인이 전담한다. 임 전 차장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인 데 대해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소회를 말씀드렸다”며 반대신문에 들어갔다. 그는 “문건에 사용된 법원 동향파악이라는 용어가 기조 심의관의 업무 범위에 포함된 것이 아니냐” 등의 질문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는 거 같아서 그만하겠다”며 신문을 마쳤다.


정다주 "임 전 차장 지시로 문건 작성" 
정 부장판사는 반대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의 증인신문에서는 임 전 차장으로부터 사건 처리 방향을 검토하도록 지시받았다고 증언했다. 검찰이 "조사를 받을 때 '사법부 권한을 남용하는 부분이 많이 포함됐고, 비밀스럽게 작성해 부담을 느꼈다'고 진술한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렇게 진술한 적 있다"고 답했다. 다만 “당시 전반적 업무 주제의 엄중함, 생소함 등 때문에 부담감을 말한 것"이라며 "대외적으로 비밀이 공표되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2014년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처분 사건과 관련한 내용을 검토한 문건도 임 전 차장의 지시로 작성했다고 인정했다. 정 부장판사는 검찰의 “재항고 사건을 인용하는 방향으로 검토하라고 임 전 차장이 지시한 것이냐”는 물음에 "결국 그런 지시를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 측 변호인은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법원의 대응방안을 검토하는 것이지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작성한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검 "절차 무시하고 이의제기" VS 임 "유도신문 안돼" 
임 전 차장은 검사측의 증인신문 방식과 내용 등을 두고 수시로 이의를 제기했다. 검찰과 여러 차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검사가 정 부장판사에게 “이런 보고서들은 내용이 민감해 다른 심의관들과 공유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는데 맞냐”고 묻자 임 전 차장은 “검찰 조사에서 말한 내용은 증인이 알지 못하므로 유도신문에 해당해 형사소송법에 따라 금지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는 “가만히 들으려고 했는데 검사가 전제를 두고 신문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기 전인 지난해 10월 15일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의 이의제기가 계속되자 검찰은 “소송 지휘는 재판장이 하는 건데 피고인측에서 계속 뭘 하지 말라고 하면 이게 과연 누구의 소송인지 혼란스럽다”고 밝혔다. 또 “증인신문 중에 계속 이의제기하는 건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심각한 문제다”며 “검사 신문에 대해 하나씩 가르치려고 지적하고 있다”고 재판부에 제지를 요청했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검찰이 임 전 차장 사무실에서 확보한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증거로 채택했다. 앞서 임 전 차장측은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했기 때문에 USB를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문건 8600여건이 담긴 이 USB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핵심 증거 중 하나로 꼽힌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