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리뷰] 킹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인육을 정말 먹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9.03.27 17:00

수정 2019.03.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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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화제작 킹덤에서 죽었던 왕은 생사초를 먹고 되살아나 좀비가 됩니다. 왕에게 물려 죽은 자의 시신을 먹은 백성들 역시 조선판 좀비인 생사역(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의문의 역병)으로 변하죠. 이들은 인육임을 알고 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병자들이 굶주림에 죽어나가는 걸 보다 못한 영신(김성규 분)이 사슴고기라 속여 국을 끓여 나눠줬죠. 킹덤의 좀비들은 그저 굶주린 죄 밖에 없습니다.

 
사람고기, 알고도 먹었을까 
인육임을 알았더라도 이들은 고깃국을 먹었을까요. 킹덤에선 적어도 인육임을 안 자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시신으로 국을 끓인 영신, 국을 뜨다 사람의 신체임을 알게 된 서비(배두나 분) 두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기록에는 인육임을 알고도 먹은 자들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최근에는 걸인이 매우 드물다. 모두들 두어 달 사이에 이미 다 굶어 죽었기 때문에 마을에 걸식하는 사람이 보기 드물다고 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이 고을 근처에도 굶어 죽은 사람이 길가에 즐비하니, 사람들의 말이 거짓은 아니리라.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육촌의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항상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듣자니, 한양 근처에서 전에는 1, 2되의 쌀을 가진 사람이라야 죽이고 빼앗더니 최근에는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서 죽여 잡아먹는다고 한다.이러다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쇄미록』, 1594년 4월 3일) [1] 
 
조선 선비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 피난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개인의 일기이고, 인육 먹는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기에 뜬소문을 옮겨다 쓴 것뿐일까요. 


세종시대 인육 사건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육(人肉) 관련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 29년(1447년) 황해도 관찰사 이계린이 “기근으로 인육을 먹은 사람도 있다”고 고하자 조정이 발칵 뒤집힙니다. 세종이 누구에게 들은 말이냐고 이계린에게 직접 추궁하기에 이르는데요. 이계린은 “사람에게 들었던 것인데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말을 흐립니다. 형조에 불려가 국문을 받으면서 비로소 말을 옮긴 이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대질 신문 끝에 말이 와전되면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결론이 나죠. 이계린을 황해도 관찰사에서 파면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2]
  
그런데 이 사건을 처리하는 와중에 새로운 인육 사건이 보고됩니다. 황해도 서흥군에서 나무하는 아이들이 산골에서 사람의 고기를 구워 먹은 흔적을 발견했고, 무덤을 파헤치고 다니는 자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집을 수색했더니 사람 고깃덩어리가 나왔다는 겁니다. 앞의 사건보다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인데요, 이 역시 조사 결과 ‘낭설’로 결론이 납니다. [3]
 
두 사건 모두 최초 보고부터 확인까지, 한 달여(세종 29년 11월 15일~12월 23일)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진상조사 결과 헛소문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는 그 사건은 정말 ‘가짜뉴스’였을까요.
 
실성해 먹고, 약으로 먹고  

의녀 서비(배두나 분)는 먹지 않았다.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주인공 자격이 있다. [사진 넷플릭스]

조선왕조실록 숙종 22년에는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이 인육을 먹었으나, 몹시 굶주려 실성한 때문이라며 특별히 사형을 감면해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4]
  
선조 9년(1576년)에는 식용이 아니라 약용으로 장기매매가 성행했다는 끔찍한 기록이 나옵니다.
 
“경외의 사람들이 인육(人肉)과 간과 쓸개를 창질(瘡疾, 피부병의 일종)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어린아이를 유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었는데, 이는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의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5]


잔혹한 굶주림 탓에 실성할 지경에 이르면 인육도 먹을 수 있고, 돈에 눈이 멀면 산 사람의 쓸개도 꺼내다 팔고, 무고한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내 병 고치겠다고 인육을 약으로 사 쓰는 것. 모두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종이 부끄러워  
다시 세종 29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인육 사건이 헛소문으로 결론 난 바로 다음 달인 세종 30년 1월 16일, 의금부에서는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최고 참형부터 태형까지 처하겠다며 왕에게 승인을 내려달라고 보고합니다. 동부승지 이계전은 “이제는 입 다물기를 더 참지 못하겠다”고, “이 뒤로부터는 비록 참으로 사람고기를 먹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숨길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도저히 들으실 수가 없게 될 것”이라며 세종에게 팩트 폭행을 쏟아내는데요.   
 
“역대의 서적이나 사기(史記)를 보옵건대,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은 것을 쓴 데가 많삽고, 또 우리나라로 말씀하면 『삼국사(三國史)』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은 것을 쓴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옵니다마는, 흉년 끝에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은 형편상 필연적으로 그리되는 것이옵니다. 이제 해주(海州)는 여러 해 연거푸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의 사망률이 대개 5분의 1이나 되온즉, 그런 일이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헛말이 나는 것이 이치의 당연한 일이오니, 요망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사옵니다.” [6]
 
세종은 부끄러워하며 애초에 진상조사를 시작한 것도 대신들의 권고에 따른 것이므로 일의 처분도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겠다며 물러섭니다. 언로를 막지 않도록 귀를 열어뒀기에 세종이 성군이라 불릴 수 있었겠지요.
  

참고 자료
[1] 쇄미록(오희문 지음,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번역, 국립진주박물관 편)
[2]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8권, 세종 29년 11월 15일, 16일, 25일 기사 
[3]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8권, 세종 29년 11월 17일, 12월 23일 기사
[4]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 2월 5일 기사
[5]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권, 선조 9년 6월 26일 기사
[6]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9권, 세종 30년 1월 16일 기사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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