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하지만 성김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협상이 ‘주고받기’라 하지만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과 북한이 동등한 선상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국무부 정통 외교관의 명예를 걸고 후세에 두고두고 짐이 될 결정은 하지 않겠다는 오기도 있었다. ‘일단 고(Go)!’ 성향의 트럼프와는 체질적으로 달랐다.
논리로 맞선 성김, 행동 우선주의 비건
행동력도 좋지만 어설픈 ‘한방’은 금물
북한의 새 카운터파트 김혁철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워싱턴 방문 당시 미국 측은 김혁철의 행동에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트럼프나 폼페이오와의 만남 당시 김영철 부위원장을 제외한 다른 일행이 입도 뻥긋 않고 조용히 있을 때 48살 김혁철은 호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수행원에 고압적으로 명령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다. ‘존재감’ 있는 협상가란 대외적 평가와 더불어, “결국은 아무리 만나봐야 얘기가 안 통하는 ‘김영철 과’”란 평가도 나온다. 최선희에 대비해 온 비건으로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평양을 2박 3일 다녀온 비건이 “실무협상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었다”고 한 건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외교 용어다. “협상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 개진이었다”는 비건의 고뇌 섞인 말이 현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리 비건이 5개월 동안 준비작업을 해 왔다지만, 정상회담을 3주 앞으로 못 박아두고 ‘바뀐 선수’(김혁철)와 다시 출발선에 선 협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3주 만에 개최도시 정하고, 요구사항 교환하고, 비핵화 구체 조치 결정하고, 상응 조치 내밀고, 알맹이 있는 합의문을 도출하는 건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물밑대화 3년을 해도 될까 말까 할 일이다. 1차 싱가포르 때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다.
비건과 김혁철이 D-10인 17일부터 2차 실무협의에 들어간다고 한다. 화끈하고 완전한 북한 비핵화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면야 최선이겠지만, ‘한방’의 유혹과 욕심 때문에 두고두고 책잡히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고 마는 어설픈 합의는 차라리 않는 게 낫다. 협상가의 최대 함정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비건의 행동력을 믿지만, 역으로 그게 더 신경 쓰인다.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 안 된 열흘’에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