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의 틀을 닦은 영조의 속을 가장 끓이게 한 것은 노론, 그중에서도 성리학의 정통이라 자부한 호론(湖論)계였습니다. 왕이 직접 부르고, 벼슬을 내려도 호론계의 주요 인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학정(學政) 일체 사회였습니다. 학계의 가장 큰 세력인 이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탕평은 ‘앙꼬없는 찐빵’에 불과할 뿐이죠. 호론은 왜 이토록 탕평에 시큰둥했을까요.
세계사적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간 조선
왜냐하면 세계사적으로 이 시기는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거친 뒤 근대로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산업혁명의 태동이 움트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어디서도 조정이 우려할만한 민란의 조짐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임진왜란 도중에 ‘이몽학의 난’ 정도가 일어났는데 이 반란의 주체는 피지배계층이 아니라 동인계에 속한 양반들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호응이 적어 금방 진압됐죠.
'성리학 최후의 보루'라는 강박
여기서 조선의 진로가 정해졌습니다. 성리학자들이 볼 때 이제 조선은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성리학의 보루였고,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명나라 몫까지 다해 성리학의 옳은 도리를 후세에 전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자각이 생겨났습니다. 중화(中華)라는 것은 중원의 땅을 차지하는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남녀 균분 상속이나 여성의 재혼 등은 제한됐고, 명나라를 복수를 갚겠다는 ‘북벌론’이 최대 정치적 어젠다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왕과 대비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몇 년간 입을지를 놓고 정치권이 두 패로 나뉘어 피를 부른 ‘예송논쟁’도 이무렵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놓고 둘로 나뉜 노론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되어 하늘로부터 고르게 덕성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보다 덕성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 정도만 다를 뿐이다.” (이간)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됐지만, 기질(氣質)에 따라 근본이 제각각 다르다.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같은 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원진)
이간의 입장은 인물성동(人物性同)-성범심동(聖凡心同)으로 연결됩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성인과 범인(凡人)도 본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강조한 입장입니다. 이를 지지한 낙론계는 대륙의 주인이 된 청나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봤고, 엄격한 신분제를 완화해 성리학적 질서에 녹일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반면 한원진이 말하는 인물성이(人物性異)는 성범심이(聖凡心異)로 이어집니다. 사람과 만물의 근본은 다르며, 성인과 범인도 기본적으로 기질이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보편성보다는 차별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에 무게를 둔 호론 측은 성인과 범인, 오랑캐와 중화, 양반과 천인, 적장자와 서얼 등의 차이를 부각하고,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이런 균열을 인정했다간 성리학의 보루인 조선마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양측 모두 송시열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그래도 호론 쪽이 보다 송시열의 주장을 순수하게 지키는 쪽이었습니다. 청나라에 대한 인식만 봐도 그렇습니다. 송시열은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북벌론'을 주장했지만 낙론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창협은 ‘정통론’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정통에서 정은 '사정(邪正)의 정'이 아니라 '편정(偏正)의 정'의 의미이니 구역의 넓고 좁음으로 말할 따름이다…선악·화이를 가릴 것 없이 천하를 하나로 한 자가 곧 정통이니 이외에 다른 논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김창협, 『삼연집(三淵集)』 中)
이 같은 주장에 따르면 조선의 소중화(小中華) 사상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호론 측 입장에서 보면 낙론은 배신자이자 타락한 사이비에 불과했습니다.
비타협적 호론, 탕평을 거부하다
“성범심과 인물성을 두고 호론과 낙론이 서로 싸워 시비를 산처럼 벌여놓으니 나뉘고 또 나뉘고 갈라지고 또 갈라졌습니다. 창을 들고 검을 쥐고서 아웅다웅 싸우니 피투성이가 되지 않는 게 그나마 행운이랄까요.” (홍직필, 『매산집』 中)
"특진관(特進官) 서지수가 나아와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사람과 물건은 본성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전에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서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내어 의제(疑題)로 삼았던 것입니다. 권상하는 이것을 다르다고 하였고, 김창흡과 이재는 이것을 같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문의(文義)를 가지고 싸우게 하고자 하는가? 나는 유생(儒生)들이 나에게 다투는 것을 결판하여 달라고 할까봐 두렵다'하고 사직(司直) 서지수를 파직시켰다." (『영조실록』 34년 9월 5일)
시간이 흐르며 호론 측 인사들도 점차 정계로 진출했지만, 성리학적 순수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조 시대에 호론계 인사들은 ‘벽파’를 구성해 정조에 적극 협력한 남인, 소론, 노론 시파(낙론계)를 견제하는 역할에 앞장섭니다. 서학 등 서양문물 수용에 대해서도 완강히 반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지금 시각에서 보자면 낙론계가 시대 흐름에 조금 더 맞을 수도 있지만, 당시 시각에선 호론도 혼란한 시대에 대한 진단과 해결방안을 내놓기 위해 고심한 지식인 층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회유나 관직 제수를 뿌리치며 이념과 철학을 지키고자 했던 태도에선 훗날 의병활동이나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호론 측 지식인들의 기개를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벽파는 어린 왕(순조)을 대신해 왕실의 최고 권력자가 된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후원을 업고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동안 '탕평'으로 묶여 있었던 남인과 소론, 낙론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엔 '배신자' 노론 시파를 비롯해 남인이나 소론 같은 '사이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에 가까웠던 왕실 종친(은언군)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광해군 시절 북인은 중앙권력의 독점으로 만족했지만, 이때는 그야말로 씨를 말리겠다는 철저한 탄압으로 이어져 수십 년 전의 언행까지 꼬투리가 잡혀 그야말로 줄초상이 났습니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 우리가 아는 정조 시대를 수놓은 유명 인사는 대개 이때를 계기로 정계에서 사라지거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상대와의 공존 가능성 자체를 뿌리뽑고자 했던 이 같은 숙청은 권력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도덕적 우월감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10년 전 정치부에 배치돼 출입처였던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을 처음 접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성의 균질성이었습니다. 의원부터 보좌진까지 'OO대 총학생회' 혹은 '전대협' 혹은 '한총련' 등에서 굵직한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각에선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갇힌 섬’과 같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자존감은 높았습니다.
군사정권의 회유나 탄압에 굴하지 않고,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고 정통 야당의 길을 지켰다는 ‘혈통적’ 자부심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꺼내 들었을 때 열린우리당 내에서 격렬한 반발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지금의 민주당은 당시와 비교하면 외연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학생운동 지도부뿐 아니라 IT 전문가, 대형어학원 오너 등 여러 곳에서 인재들이 충원됐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중도층의 지지까지 획득해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창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석수가 부족해 야당의 협조 없이는 개혁법안의 처리도 어렵고 이런 환경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를 강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 내부에서 주요 정국마다 도덕적 우월성을 내비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면 협치의 가능성은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도 듭니다. 여당 대표가 '보수 궤멸'을 말하거나 사찰 의혹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이 'DNA'를 강조하며 일축할 때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경구 『호락논쟁을 통해 본 철학논쟁의 사회정치적 의미』·『조선, 철학의 왕국』, 허태용 『호락논쟁은 어떻게 계승된 것인가 - 사상 계보 그리기의 어려움』, 조성산 『18세기 호락논쟁과 노론 사상계의 분화』·『17세기 후반~18세기 초 김창협·김창흡의 학풍과 현실관』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