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8)
일본에서 내가 맺은 인연 중에 가장 큰 것은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가 아닐까 싶다. 학부모회 활동을 했던 인연으로 매해 초대장이 날아온다.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은 그 학교의 고문 겸 평의원회 의원이라는 입장에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둥지를 튼 지 20여 년. 나는 상상 이상으로 일본 사회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땅에 발을 붙이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결혼할 당시는 '가정주부로 조용히' 살 줄 알았다. 혈연·지연·학연 등 남편 이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니 당연하지 싶다. 하지만 나의 운명인지 뭔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며 조용히 살 팔자는 아니었다.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하늘도 손을 내미는지, 운 좋게 얻은 일이 한일자막번역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과 많이 연관된 것어서 일본 사회에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나를 채용해준 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이었다. 20년쯤 전 일인데도 면접 날 입던 옷과 신발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나에게는 역사적인 날이다.
아이들이 취학하면서 일본 배우기 시작
일본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은 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 또한 아이들과 같이 일본을 배워 나갔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닐 때 학부모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사정을 알 리 없는 일본의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를 보내야 하니 그곳의 환경을 파악하고 싶었다. 절실했다. 그래서 학부모 활동을 하자는 제의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열심히 활동한 이유에는 남편이 아이들의 진학에 욕심이 없다는 점도 있었다. 나는 스스로 벌어가며 야간대학에 다녔던 사람이니 가능한 한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자녀 교육은 내가 맡기로 했다.
일본에는 '아버지의 뒷모습(父の背中)'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 특히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라는 말이다. 우리 집은 아들만 둘이다. 요즘은 아버지라는 말 대신 부모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럼 어머니의 역할은’ ‘뒷모습을 보여 줄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아버지를 모델로 삼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이들 의문 속에는 내 아이들이 아빠를 닮지 말았으면 하는 본심이 들어있기도 했다.
나이 50줄에 들어선 지금은 평화주의자에 현재를 즐기자는 남편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있지만, 자녀의 성공이라는 단어를 버릴 수 없던 젊은 아내의 눈에는 그 당시의 남편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니라면 ‘어머니의 뒷모습’이라도 보여주고자 결심했다.
아이들은 지금 대학 4학년과 1학년이다. 결과적으로 남편과 나의 모습은 적절하게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생각한다. 남편이 내 색깔에 물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 또한 남편과 시댁 색깔에 물들지 않기를 잘했다고.
친구들은 종종 "당신네 같은 국제결혼 부부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외국인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부인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우리는 오히려 외국인인 내가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결과적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기반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를 외국인이라고 과잉보호하고 돌봐주는 남편이었다면 내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선생님과 지역주민이 교류하는 ‘학교평의원회’
2018년 11월 2일은 초등학교의 ‘학습 발표회’ 날이자, 올해 들어 세 번째 ‘학교평의원회(学校評議員会)’가 있는 날이었다. ‘학교평의원회’는 2000년부터 시행된 것으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교장의 요청에 따라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1년에 4번 분기별로 모여 학교 활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다.
평의원에게는 지역에 있는 학교에 대한 정보를 듣는 기회가 되고, 학교 관계자는 지역 사회의 사정과 의견을 듣고 학교 행사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등 지역 주민과 교류하는 기회가 된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조금 고민했지만, 지금은 ‘선생님 응원단’을 자칭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회의는 12시부터였으나 학습 발표회를 보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아이들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zan32503@nift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