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부부가 죽음을 선택한 배경은 친구의 부인인 이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씨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1심은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뤄진 2심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부는 사실상 유일한 객관적 증거인 모텔 폐쇄회로TV(CCTV) 녹화자료와 사건 이후 이씨의 행동을 토대로 이 같은 판단을 했다.
대법원, 친구 부인 성폭행 혐의 무죄 사건 파기환송
원심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 결여 판결 지적
지난 4월 처음 등장 후 성폭력 재판 변화 예고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인정될 여러 사정이 있는데도 증명력을 배척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은 사실을 오인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했다.
특히 원심 판결에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 없다고 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씨가 모텔에서 ‘성폭력 피해자’처럼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고 판단하라는 의미다.
대법원 대법정 [중앙포토]
성인지 감수성은 대법원 판결에서 지난 4월 처음 등장했다. 대법원 제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대학교수가 낸 해임 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했다”고 2심 재판부의 판단을 지적했다. 또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 전경. [연합뉴스]
우려도 있다. 법원이 지나치게 여성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객관성을 잃은 재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주장이 곧 증거’가 돼 증거재판주의나 무죄 추정 원칙이 깨질지 모른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지적은 피해자가 법원 판결로 두 번 상처를 입는 일을 줄일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자칫 무고 등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