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법이 다르다 보니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평가도 정반대일 때가 허다하다. 조직과 사회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언행이 리더의 허명(虛名)을 위한 것임을 발견할 때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화합과 소통이란 촛불정신을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정부와 차별성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 판문점 선언에 대한 비준 여부 논란에 헌법 조항을 끌어다 대는 이 정부 사람들의 논리가 궤변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섬김이 아닌 윽박지름과 군림의 체취가 점점 더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해왔던 건전한 시민의 상식은 어디로 갔을까. 가뜩이나 심사가 뒤숭숭한 법원을 향해 SNS 놀이를 해대는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저잣거리의 민심을 대통령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은 철부지 같은 바람일지도 모를 일이다. 민정수석이 아닌 학자로서 논문을 쓰고, SNS로 법관들의 속을 박박 긁어놓고는 ‘과거 음습한 불법 행태의 배격’이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통령 발언을 “대통령이 아닌 변호사 자격으로 한 말이냐”고 역으로 질문해도 되나.
후배 법관 징계하고 “나는 이기는 편에 선다”는 대법원장
유력 정치인엔 유감, 동료 검사 죽음은 외면하는 검사장
한 고법부장 판사가 전한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사법부를 잘 되는 방향으로 이끌 테니 나를 믿고 따라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간부의 말은 뉘앙스가 다르다. “큰 틀에서 조직을 지켜내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의 부연설명은 좀 더 직접적이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에 반기를 들어 충돌이 생기면 국민들은 사법부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한 사법부를 위한 고육지책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법농단이라며 검찰을 끌어들이고, 눈엣가시 같은 고법 부장판사를 일선 법원장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징계를 내리는 소동을 자초한 것은 바로 대법원장 자신이었다. 후배 법관들의 뒤통수는 ‘조직 보호’를 위한 희생양이었던가. 이러고도 삼권분립을 말할 수 있을까.
최근 국감장에서 있었던 서울중앙지검장의 애도 발언도 그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검사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11월 유명을 달리해 곧 1주기가 되는 변창훈 전 검사 사건 때문이다. 노회찬 전 의원과 박지원 의원 같은 유력 정치인에겐 고개를 숙이고, 이유야 어찌 됐든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 검사에겐 그 흔한 유감의 표현도 하지 못한단 말인가. “피가 거꾸로 솟는단 표현으로도 모자란다”는 유족들은 아직도 대한민국과 검찰에 대한 원망을 씻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조직을 위한 충성이라면 번지수가 조금은 어긋난 것 같다. 승자의 포용과 용기는 어디로 갔나. 겉으로만 개혁과 변화를 외치고 속으론 불타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검정새치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나.
절대다수의 행복을 빙자한 절대 소수의 만족을 위해 오늘도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희생과 침묵을 강요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정과 정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새삼 실감하는 요즘이다. 적어도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으려면….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