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누빔옷이 패딩처럼 유행할 날 왔으면

중앙일보

입력 2018.10.19 10:00

수정 2018.10.1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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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정은의 장인을 찾아서(9)

김해자 중요무형문화재. 바느질하는 모습. [사진 김은주]

 
‘누비’ 하면 젊은 사람은 생소할 수 있지만,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두툼한 솜의 포근함을 떠올릴 수 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요즘 같은 날씨면, 명주 실크로 만든 누비옷을 입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한 젊은 장인. 누비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지향하며 차분한 열정으로 묵묵히 20년 한 길만 바라보고 온 국가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이수자 김은주 장인(41)을 만났다.
 
누비란 정확하게는 겉과 안을 맞춘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이나 솜과 유사한 충전재를 넣고 여러 줄을 곧게 홈질 또는 박음질하는 바느질 기법을 말한다. 전통적인 솜 누비는 홈질을 사용해 연속적인 곧은 선과 절제된 아름다움이 나타나도록 한다. 누비는 색감만으로 화려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누비 땀의 간격, 선의 방향, 질감, 그 모든 것이 디자인의 요소가 된다.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누벼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국의 전통 누비는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옷과 생활용품에 적용해왔다. 고려 말에 이르러 목화를 널리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면직물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에 의생활이 다양해지면서 누비옷의 대중화가 가능해졌다.
 

누비 버선. 방한용으로 목화솜을 넣은 것으로 명주 실크 홈질한 누비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 이정은]

 
예로부터 누비는 방한용, 장식용 등의 용도에 따라 다양한 생활용품에 활용했다. 가리개, 토시 등 추위를 막는 용도의 복식, 이불, 방장, 물건을 보호하는 보자기 등에 쓰이는 누비 기법도 각각의 용도에 맞게 다양하다. 그중 누비이불은 장수를 상징하면서 과거에는 혼수 이불로 인기였지만, 그 전통이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있다.


누비 배자. 명주, 목화솜, 명주실로 만들었으며 저고리 위에 덧입는 주머니나 소매가 없는 방한용으로 솜을 넣어 누빈 배자. [사진 이정은]

 

“전통 누비는 받침옷이 많아요. 등을 따뜻하게 하는 등걸이만도 있을 정도로 간절기에 사랑받던 대표적인 옷이었어요. 특히 누비는 보온성이 좋고 쉽게 해지지 않아 자주 세탁해야 하는 아기 옷에 적합해요. 예전에는 아기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땀씩 여러 땀을 모아 누비 기법으로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러한 문화 역시 오늘날에는 보기 힘들죠.”

 
누비란 말은 사실 스님들이 닳고 해진 부분을 누더기처럼 기워 입던 ‘납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누비옷을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주로 산속에서 주로 머물며 추위를 견디기 위한 스님들이라고 한다. 김은주 장인은 20살 이후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고모가 스님이어서 스님의 삶을 동경했다. 절에 자주 다니면서 인연이 된 한 스님 가족의 한복을 제작하다 보니 자연스레 21살부터 한복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해자 중요무형문화재(왼쪽)와 김은주 문화재 이수자 장인. [사진 이정은]

 
2002년 장인이 25살이 되던 해에, 운이 좋게도 김해자 누비장(65)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1996년 누비장 보유자가 되어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스승 역시 처음에는 한복을 전문적으로 배워 한복집을 운영했는데, 그 과정에서 바느질과 누비를 배웠다.
 

김은주 장인이 오목누비 저고리를 만들기 위해 누비하고 있다. [사진 이정은]

 
2006년 4년 만에 김은주 장인은 이수자 자격을 받았다. 그 후 제자로서 도제교육은 2009년까지 약 7년 동안 받았다. 2010년 도제교육을 마친 후에는 현시대에서 누비 기법을 응용한 옷을 만들기 위해 의류학과에 진학했다.

20대의 젊음을 누비에 바친 그. 누비는 동일한 작업을 반복해야 하므로 지루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집중하지 않으면 누비 선이 어긋나게 되므로 수행자의 자세와 같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최종 목표가 어떤 것인지 묻자, 장인은 “워낙 누비 하는 사람이 많아 문화재가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한 우물을 깊게 파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중이에요”라고 답했다. 누비에 대한 수요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스승님은 꾸준히 내방 고객이 있어서 항상 일하고 계세요. 그 덕분에 저를 포함한 제자들이 일을 분담해 도와 드릴 때가 많죠. 누비의 인기가 확 오르는 시기는 아직 안 온 것 같아요”라고 했다.
 

“오늘날 패션 트렌드에 맞춰 누비옷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저의 생각은 비록 누비가 두꺼운 외투를 대체할 수 없지만, 받침옷으로 충분히 누비옷이 대중화하기를 꿈꿔요. 평창 올림픽 때 롱 패딩이 유행했잖아요. 패딩보다 누비가 가벼운데, 패딩처럼 따뜻한 누비를 젊은 층에 대중화하고 싶어요.”

 

퀼트는 색상이 다양하지만 누비는 같은 색으로 원단에 바느질만 해서 색상이 튀지 않는다. 온박음질한 색실 누비 매트. [사진 김은주]

 
한국과 늘 문화를 주고받은 중국과 일본은 기계 누비가 발달했다. “서양의 퀼트 역시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이나 동물의 털 등 보충재를 넣어 바느질한다는 점에서 누비와 비슷해요. 하지만 소재와 누비 방법에서 우리의 누비와 대조적인 차이가 있어요. 퀼트는 색상이 다양하고, 누비는 하나의 옷이나 이불로 색상이 튀지 않죠. 같은 색으로 원단에 바느질만 해요.”
 

“누비는 손님이 와도 천천히 하는 느림의 미학이 있어야 해요. 조끼 정도의 받침옷은 10일 정도면 만들지만 적어도 다른 옷은 한 벌당 3주에서 한 달이 걸려요. 작품 크기에 따라 기성복은 제작 기간이 단축되기도 하고요. 누비를 입기 가장 좋은 계절은 5, 10, 11월 간절기에요. 오랜 시간 정성을 쏟아야 하는 누비옷은 고가일 수밖에 없어요.”

 

누비포와 조끼. 명주, 목화솜, 명주실로 제작했다. 디자이너와 협업으로 제작한 누비포 하얀색(외출용 외투)과 하늘빛 조끼. [사진 이정은]

 
목화솜이 들어간 부드러운 누비 두루마기 코트는 300~400만원 정도이며 가장 빨리 완성되는 조끼가 100만원 정도다. 물론 기계로 제작하게 되면 훨씬 저렴해서 기성복을 제작할 수 있다.

해외 명품의 실크나 캐시미어 옷 등 고가의 수공예 가치는 알면서도, 누비의 가치를 모른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재미난 것은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주로 사용한 한국의 오목 누비가 오늘날 유행하는 일본의 명품 패션브랜드 이세이미야케의 대표 옷 기법처럼 주름을 잡은 것이다. 겉감 안감을 홈질하면서 다림질하면 늘었다 줄었다 하는 누비는 이세이미야케의 주름 옷과 닮은꼴이다. 그러니 더욱 오늘날 우리 문화재의 기술이 귀하게 느껴진다.
 
장인은 누비의 맥을 잇기 위해 많은 문화재 이수자를 통해 누비의 초·중급 과정을 교육하고 있다. “누비 하는 것은 은퇴 이후는 좀 어려워요. 물론 의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눈이 좋아야 하고 섬세해야 하기 때문이죠.”
 
한국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꼭 한 번쯤은 누비를 배워 젊은 누비 장인과 함께 현시대 의류에도 맞게 전통을 현대화하면 좋겠다.
 
이정은 채율 대표 je@chey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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