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1만2000년 전 유골 ‘루치아’, 수천년 된 이집트 미라,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한 페드루 1세의 유품….
200년 역사의 브라질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인류 유산이 화마(火魔)에 휩쓸렸다. 최악의 경우 소장 유물 2000만 점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을 수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은 "200년에 걸친 연구와 자료를 잃은, 브라질에 비극적인 날"(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이 돼버렸다.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소장유물 90% 불탄 듯
1만2000년 된 인류 조상 유골 등 값어치 못 따져
"브라질 역사 사라져" "부패한 정치 탓" 분노 확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화재로 인한 손실은 가늠키 어려울 정도다. 3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불길에 날려간 고문서들이 3㎞ 바깥까지 날아가 휴지조각처럼 뒹굴었다고 전했다. 한 관료는 현지 매체에 “소장품 90%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1784년에 발견된 5.36t 무게의 운석은 겨우 소실을 면했다. 리우 연방대학 부속의 국립박물관은 라틴 아메리카 최대 역사·과학 유물을 소장한 곳으로 대영박물관(영국)이나 스미소니언 박물관(미국)에 비견돼 왔다.
브라질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민 수백 명은 날이 밝자 박물관 정문 앞에 몰려와 현장 확인을 요구하며 내부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충돌했다. 알레산데르 케우네르 박물관장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 나라의 창세기가 불탄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분과 브라질의 역사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물관은 그간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려 왔다. 흰개미떼 습격으로 5개월간 폐쇄됐던 공룡전시실이 민간의 크라우드펀딩에 힘입어 최근에야 문을 열었을 정도다. 박물관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왔지만 정부의 긴축 재정에 따라 지원금이 대폭 삭감됐다. 현지 언론은 2013년 13만 달러였던 박물관 예산이 지난해 약 8만4000달러로 줄었다고 전했다. 부관장 루이즈 두아르치는 “리우올림픽(2016) 경기장 한곳에 쓴 돈의 4분의 1이면 박물관을 더 안전하고 멋지게 만들 수 있었다. 박물관이 무너진 책임은 연방정부에 있다"고 개탄했다.
브라질 국립박물관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인 1818년 주앙 6세 당시 포르투갈 왕이 이집트 미술품이나 공룡 화석 등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했다. 한때 왕족이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1822년 주앙 6세의 아들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 자치정부의 독립을 승인하는 칙령에 서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외신들은 이번 화재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오는 10월 대선 및 총선의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고질적인 부패 스캔들에 헤알화 추락 등 경제난에 시달리는 브라질은 올 10월 대선을 앞두고 극심한 정국 혼란에 빠져 있다. 테메르 대통령은 이날 브라질 주요 기업, 은행 대표자들과 회동하고 박물관 재건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프랑스 전문가를 파견해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