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선배와 점심 먹으려면 신고하라" 공무원들 긴장

중앙일보

입력 2018.04.16 00:47

수정 2018.04.1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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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세종청사에서 일하는 김모 국장은 다음 주로 잡았던 선배 공직자와의 점심 약속을 취소했다. 17일부터 퇴직 공무원과의 사적인 만남을 할 때는 사전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새 공무원 행동강령이 시행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날짜를 정했기 때문이다. 김 국장은 “퇴직한 공직자와 만날 경우 기관장에게 통보해야 하는데 미처 하지 못했다”라며 “이미 정해둔 약속이라 그냥 만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제도 시행 초기에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선배에게 양해를 구했다”고 말했다.
 
17일부터 개정된 공무원 행동강령이 시행되면서 관가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행동강령 시행일을 앞두고 각 부처는 신설 규정 등을 전파하면서 직원들에게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공무원들도 제도 변경 초기에 적발될 경우 ‘시범 케이스’로 일벌백계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주의하는 모습이다. 행동강령 위반은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공무원 징계 대상이 된다. 견책 등 경징계뿐 아니라 최고 파면 등의 중징계도 받을 수 있다.

내일부터 시행, 위반 땐 최고 파면
함께 골프, 여행, 사행성 오락 땐
기관장에게 미리 통보 조항 생겨
전관예우 막으려고 만들었지만
일각선 “개인적 친분까지 막나”

공무원 행동강령은 2003년 5월 19일 만들어진 ‘공무원의 청렴 유지 등을 위한 행동강령’이 모태다. 당시 시행된 부패방지법이 공무원이 지켜야 할 세부 규정들을 행동강령에 위임하면서 만들어졌다. 새 행동강령은 열 번째 개정판이다. 국민권익위는 지난해 공공기관 채용 비리, ‘공관병 갑질’ 논란 등 공직자가 지위나 권한을 남용해 사익을 추구한 사태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이를 근절하기 위해 행동강령을 개정했다.
 
새 행동강령은 민간 부문에 대한 공직자의 부정 청탁, 즉 직무 권한이나 영향력을 행사해 민간에 알선·청탁하는 것을 금지했다. 부하 직원이나 직무 관련 업체에 개인적인 업무를 시키는 등 사적 노무를 요구하는 행위도 금지 대상에 포함됐다.
 
이 밖에도 ▶자신 및 친인척 관련 회사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을 경우 기관장에 신고 ▶고위 공직자 임용 시 3년간의 민간 분야 활동 내역 제출 ▶직무 관련 민간 업체에 대한 자문 제공 등 영리 행위 금지 ▶관련 기관 또는 산하기관의 공무원 가족 채용 또는 수의계약 금지 ▶자신 또는 가족과 직무관련자와의 금전 및 재산 거래, 계약체결 내역 신고 등 규정을 신설했다.


이 중 공무원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건 선배 공직자와의 사적 만남 차단 조항이다. 행동강령은 공무원이 퇴임 후 2년이 지나지 않은 소속 기관 퇴직자와 골프, 여행, 사행성 오락을 같이하는 행위 등 사적 접촉을 하는 경우 소속 기관의 장에게 신고해야 하도록 했다. 퇴직 공무원과의 접촉이 ‘전관예우’ 등의 비리나 불법 유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규정이다.
 
기획재정부의 한 과장은 “신설 조항들은 대부분 그 자체로 도덕적, 법적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이라 추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지는 않더라”며 “다만 퇴직 선배들의 경우 자의가 아니라도 술자리 등에서 부딪히는 상황이 많은 만큼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부세종청사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만나는 것까지 규정을 통해 금지하는 건 다소 심한 것 아니냐. 당분간 퇴직 선배들과는 약속을 잡지 않을 생각인데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이를 반기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과장급 공무원은 “퇴직한 뒤 기업체나 로펌에 취직한 선배들이 업무와 관련된 부탁을 하기 위해 만나자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만나기도, 거절하기도 난감했다”며 “앞으로 행동강령을 핑계로 내세우면 부담 없이 요청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세종=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