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한국법 100년 역사 가장 압도적 영향 준 분

중앙일보

입력 2017.11.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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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가인 김병로』를 펼쳐보이며 웃고 있는 한인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웃음에서 홀가분함이 배어 나왔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서슬 퍼런 직함이 무색해지는 웃음이었다. 한인섭(59)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그는 벽돌처럼 묵직한 책을 들고 숙제 마친 아이 모양 맑게 웃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못했지. 꿈에서도 선생을 뵀으니까. 잠꼬대한다고 아내가 깨우기도 했어요.”

920쪽 전기 펴낸 한인섭 서울대 교수
‘판결문은 추운 방서 손 불며 써야’
가인의 진면목 극적으로 드러내
“선생 생애만 알아도 삶 달라질 것”

김병로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한 교수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1887∼1964·사진)의 생애를 920쪽에 달하는 『가인 김병로』(박영사)로 복기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가인은 한국 법 100년 역사에서 가장 우뚝하고 압도적인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지금도 ‘가인 선생이 말씀하시길’이라고 말을 여는 법률가가 많습니다. 선생의 업적 80∼90%가 법률과 관련한 것입니다. 가인의 인생과 업적을 좇는 것은 법률가로서 당연합니다.”
 
가인은 대한민국 법률의 초석을 닦은 법조계의 어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상변호사’로 활약했다. 안창호·여운형·박헌영 등 좌우익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했다. 1957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58년 경향신문이 폐간됐을 때 가인은 “앞으로 민주주의라는 말도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는 글을 발표했다. 선생의 아호 가인(街人)은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방황하는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역사에서 법률가는 주로 권력 주변에 있었습니다. 주역도 아니었고, 말하자면 부역이었죠. 그 반대편에 가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법 역사에서 법률가로서 본령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으로서 바로 선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인의 삶은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니라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사생활이 아예 없었다는 뜻이다. 공사의 구분이 유난히 엄격했다. 이를테면 선생의 가족 중에서 대법원장 관용차를 타본 사람은 없었다. 손자(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군 면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현역으로 근무했다. ‘판사는 가난해야 해. 판결문은 추운 방에서 손을 혹혹 불어가며 써야 진짜 판결이 나오는 거야(547쪽).’ 한 교수가 가인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며 읽어준 구절이다.
 
“법률가로서 가인의 업적은 우리의 기본 법률을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형법·형사소송법·민법 등의 초안을 잡은 것이 아니라 선생이 직접 조항을 썼습니다. 민법 1조부터 1000조까지 손으로 다 썼습니다. 부산 피란생활 중이었습니다. 병에 걸려 왼쪽 다리를 절단한 몸이었지요.”
 
책은 ‘가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쓴 한국 근현대사’라 할 만큼 내용이 방대하다. 한 교수가 1차 자료를 뒤져 가인의 인생과 업적을 재구성했다. 32∼42년 항일변호사로 활동했던 기록은 새로 찾아낸 것이다. 책값은 3만원이다. 한 교수가 출판사를 설득했다. 일반인도 가인의 삶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 책은 법률가에게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일반인은 이 책을 통해 이런 삶도 있었다고 알게 되겠지요. 가인처럼 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가인처럼 살다 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 인생은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가인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주인공이 앞에서 웃고 있었다. 독자로서 귀한 것은, 가인의 강직했던 생애보다 가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한 법학자가 기꺼이 바친 세월일지 모른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