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남정호의 시시각각] 전술핵이 통일을 막는다고?

중앙일보

입력 2017.09.06 02:05

수정 2017.09.06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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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부른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행법칙은 역사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북핵 문제에도 통하는 원칙이다. 실제로 북한 핵폭탄의 숫자와 위력이 증가하면 살상력만 커지는 게 아니다. 이로써 게임의 룰이 바뀐다는 게 중요한 대목이다.
 
북핵 숫자부터 보자. 서너 개쯤이면 정보원을 통해 위치를 파악한 뒤 단숨에 깨버릴 수 있다. ‘예방적 타격(preventive strike)’이 가능하단 얘기다. 하지만 10개가 넘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깊은 땅굴에 숨겨진 핵폭탄을 모두 찾아내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작전에 돌입했다가 핵폭탄을 일소하지 못하면 수백만 명이 죽는 핵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미국이 군사행동에 못 나서는 근본 이유다. 북한은 최소 10개, 최대 60개의 핵무기를 지녔다고 한다.

서독, 미사일 위협에 퍼싱II 도입 결단
‘공포의 균형’ 달성 후 평화통일 이뤄

북핵이 원자탄에서 수소폭탄으로 진화하면 위력만 커지지 않는다. 핵폭탄의 성격이 전술핵에서 전략핵으로 바뀐다. 300kt급 전술핵은 반경 30㎞ 내를 쓸어버리지만 수십, 수백 배 위력의 전략핵은 한국 정도는 나라 전체를 초토화한다. 적국이 전술핵만 있다면 국지적 피폭을 감수하고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전략핵으로 무장했다면 보복 공격으로 온 나라가 파괴된다. 이제 미국도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이 같은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1964년 중국이 첫 핵실험을 앞뒀을 때도 미국은 펄펄 뛰었다. 1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싸웠던 중국이 핵무기를 갖게 된다는 건 용납 못할 사태였다. 심지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실험을 관두지 않으면 핵 개발지인 신장은 물론 베이징까지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어떻게 됐나. 중국은 원자탄·수소폭탄에 이어 인공위성까지 개발했고 이제는 핵보유국으로 공인받았다.
 
지금 북한은 수소폭탄에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거의 완성했다. 본토가 위협받게 된 미국으로선 ICBM 개발 중단을 약속받는 대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빅딜도 할 처지다. 우리로서는 북핵 위협 속에 전전긍긍하며 살 수밖에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국민의 목숨이 걸린 안보 문제에선 99.9%란 의미가 없다. 북의 공격을 받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털끝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공포의 균형 (balance of terror)’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독자적 핵 개발과 미군 전술핵 재배치라는 두 방안이 존재한다. 이 중 핵 개발은 국제사회의 반대가 격심할 게 분명한 만큼 전술핵 카드가 현실적이다.
 
청와대는 여기에 극력 반대한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맞지 않을 뿐더러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따라서 전술핵 도입 시 평화통일은 불가능해진다는 게 논리의 핵심이다.
 
과연 그럴까. 냉전이 최고조였던 75년, 소련은 동독 등 동구에 중거리탄도미사일 SS-20 650기를 기습 배치했다. 그러자 서독 슈미트 정부는 격렬한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미국으로부터 퍼싱II 미사일 96기를 들여와 배치한다. 공포의 균형을 이룬 셈이다.
 
이로써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난 서독은 마음 놓고 독자적인 동방정책을 펴 90년 통일을 이뤄낸다. 전술핵이 있어도 평화통일은 가능하다는 걸 역사가 웅변하는 것이다. 당시 서독에서 물결쳤던 구호는 이랬다. “지붕 위로 떨어지는 SS-20보다는 앞마당 퍼싱II가 낫다”고. 시간이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법이다. 누가 뭐라든 북핵 공격보다 전술핵 재배치가 낫지 않은가.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