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윤 경제부장
웨스팅하우스나 캔두는 한국에 기술 이전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한국 엔지니어가 원자로의 설계 도면을 베끼면서 기술을 익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면 “당신이 무얼 알겠느냐”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조사, 원전 포기로 읽히면 안 돼
세계시장 뚫은 토종 원전 기술에 대한 청사진 마련해야
엔지니어들은 현장 야전침대에서 밤을 새워 가며 기술을 익혔다. 기술자립도가 95%까지 올라갔다. 기술 전수만 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더 심화시켰다. 2005년 한국표준형원전인 ‘OPR(Optimized Power Reactor)1000’이 탄생했다. 설비용량 1000메가와트(㎿), 설계수명 40년, 내진설계 0.2g(리히터 규모 약 6.5)의 토종 원전이다. 고리·월성·한빛·한울 원전에 총 10기를 운용 중이다.
새 정부가 건설을 잠정 중단하고 공론조사를 통해 운명을 정하겠다고 한 신고리 5, 6호기는 ‘APR(Advanced Power Reactor)1400’이라는 3세대 원전을 적용했다. OPR1000을 진화시켜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인 모델이다. 설비용량 1400㎿, 설계수명 60년, 내진설계 0.3g(리히터 규모 약 7.0) 규모다.
한전은 APR1400으로 2009년 12월 일을 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총 186억 달러(약 21조원) 규모의 원전 4기를 수주했다. 국제 공개입찰 방식에서 프랑스·일본 등 원전 강국을 눌렀다. 이 액수는 당시 기준으로 현대자동차 쏘나타 100만 대, 또는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180척 수출과 맞먹는 규모다. 국내에서도 이미 완공한 신고리 3호기와 공정률이 90% 이상인 신고리 4호기, 신한울 1, 2호기가 APR1400 원전이다.
탈(脫)원전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원자력을 줄이고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발전 정책을 전환하자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길을 가려면 수요자인 국민이 비싼 전기요금을 감당해야 한다. 못할 것도 없다. 원전의 폐로(廢爐) 및 환경 비용을 따지면 원자력 발전의 총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마당에 전기요금 못 올릴 바 아니다. 한국의 전기요금은 원전과 석탄화력 발전 덕에 주요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싸다. 전기 과소비의 원인이기도 하다.
고민해야 할 것은 원전 기술이다. 한국은 미국·프랑스·러시아·캐나다에 이은 다섯 번째 원전 수출국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학자·엔지니어는 물론이고 세금으로 뒷받침한 국민이 땀 흘려 이룩한 성과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이젠 미국·프랑스 등에서 일부 우리 기술을 역수입할 정도다.
이런 한국이 원전 건설을 중단한다면서 다른 나라에 원전을 수출하겠다고 나설 수 있나. 결국 국내 인력과 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 것이다. 원전 산업이 무너지는 공식이다. 한국은 일자리 부족, 미래 먹거리 부족에 고민하는 나라다. 더 성장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제대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의 기술진은 이미 APR1400의 성능을 향상시킨 APR+를 개발 완료했다. 4세대 원전인 ‘IPower(Innovative Power)’ 개발에도 착수했다.
신고리 5, 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배심원단이 곧 구성된다. 한국 원전기술의 운명도 이들 손에 달려 있다. APR1400이 눈물 흘리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시장에 우뚝 선 우리의 원전기술이 사장돼선 안 된다. 미래 청사진까지 함께 그릴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나와야 한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