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비빔밥의 원형은 이렇지 않았다. 비빔밥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시의전서』를 보면 비빔밥은 주방에서 한차례 비벼서 나오는 ‘비빈 밥’의 형태였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밥에 반찬을 넣고 고추장 양념에 비빈 뒤 고명을 얹어주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도 황해도 해주와 전북 익산에 ‘비빈 밥’이 내려오고 있다.
익산 '진미식당' 육회비빔밥
주문 받은 뒤 주방에서 비벼줘
토렴한 밥, 선지국 맛도 일품
황등육회비빔밥은 이렇게 서민의 음식으로 발전했다. 비빔밥으로 유명한 진주·해주·전주·안동 등은 모두 대도시이거나 반가의 고장이었다. 이들 지역의 비빔밥이 고관대작들이 즐긴 별미였다면, 황등비빔밥은 새벽부터 장터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시작한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고마운 한 끼니였다.
황등면이 대표적인 비빔밥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진미식당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진미식당은 1대 사장 고 조여아씨가 시장통에 처음 문을 열었고 그의 딸 원금애씨가 물려받았다. 가업은 어느덧 3대째에 이르렀다. 원씨가 아들 이종식씨에게 식당을 물려줬다. 원씨는 손이 모자랄 경우에만 가끔 나선다.
진미식당은 전통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주방에서 이종식 사장이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삶은 콩나물을 넣고 사골국물에 여러 차례 토렴을 한다. 그 모습이 꼭 밥을 헹구는 것 같다. 여기에 양념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 등을 넣고 비빈다. 대단한 주방 도구가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숟가락으로 슥슥 비빈다. 다음엔 밥그릇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당근과 상추·시금치 나물·김 가루·황포묵, 그리고 황등비빔밥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소고기 육회 한 줌 얹어 살짝 달구면 황등육회비빔밥(8000원, 특 1만원)이 완성된다.
비빔밥에서는 묘하게 정겨운 맛이 난다. 엄마가 어린 자녀에게 소화 잘 되라고 쇠고기국을 적셔주는 그 진솔하고 소박한 맛이 비빔밥 안에 버무러져 있다. 또 고기국물에 토렴한 고소한 밥과 통통한 쇠고기 박살이 입에서 묘하게 어우러진다. 함께 내주는 고소한 선지국도 맛있다. 매운 양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선지국이 비빔밥과 놀라운 합을 이뤄낸다.
황등비빔밥은 손이 많이 가는 것이 흠이다. 손님이 많을 때는 수십 분을 기다려야 한다. 입맛이 둔한 사람은 ‘식당에서 비벼주나 대충 비벼 먹으나 별 다를 게 있나’ 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종식 사장은 “우리가 비벼서 내주는 것이 훨씬 맛있기에 이 방식을 고집한다”고 말한다.
글·사진=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