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유런의 목숨을 구해준 시수쩡(앞줄 왼쪽 일곱번째)은 돤치루이 내각의 실력자였다. 참모총장 시절 몽고를 방문한 시수쩡. 연도미상.
1917년 봄부터, 천유런은 자신이 경영자나 다름없는 영어신문 징바오(京報)에 사론(社論)을 직접 썼다. 국가 이익을 도외시하는 정객들의 추태를 연이어 폭로했다. 돤치루이는 눈만 뜨면 신문을 집어 던졌다. "이게 선전포고지 무슨 놈에 사론이냐? 나를 향한 조준사격이나 다름없다"고 노발대발했다.
친일 돤치루이 총리 비판해 투옥
유감 표명도 거절하고 죽을 각오
석방 후 쑨원 찾아가 외교 대표로
"아이들 혼자 키울 자신 있다" 부인 편지에 안도
2 천유런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도 뛰어났다. 부인이 세상을 뜨자 30세 연하인 장징장(張靜江)의 딸과 재혼했다. 1931년, 프랑스 파리.[사진=김명호 제공]
시수쩡이 돌아간 지 몇 시간 후, 간수가 천유런의 감방 문을 열었다. 야릇한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좋은 곳으로 가자." 천유런은 죽음을 직감했다. 가보니 또 면회실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묘책을 제시했다. "베이징의 정치판은 복잡하다. 몇 년간 씻지 않은 엉덩이보다 더 지저분하다. 너는 태상황(太上皇)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살아날 방법이 없다." 이어서 국적 문제를 거론했다. "너는 영국 국민이다. 돤치루이에게 압박을 가해달라고 영국 공사관에 도움을 청하겠다."
듣기를 마친 천유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사 된다 해도, 그런 방법은 쓸 수 없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영국 국민이었다. 영국 부영사를 찾아가 중국 수도에 거주하는 영국인으로 등기했다. 2년 후 연장 수속 밟으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거절했다. 현재 내 신분은 베이징에 사는 중국 국민이다. 영국에 보호를 요구할 수 없고, 영국도 나에게 사법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 책 읽으며 고독을 즐기겠다." 친구가 홍콩과 상하이의 일류 변호사와 의논하겠다고 하자 그것도 거절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 속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변호사가 나설 문제가 아니다."
국선 변호사들이 런던에 있는 부인의 편지를 들고 왔다. 남편의 처지를 걱정하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나는 별 일 없고, 애들도 잘 자란다. 집안에 웃음이 그칠 날이 없다. 혼자 양육할 자신이 있다." 천유런은 마음이 놓였다.
일본과 경쟁하던 미국이 막후서 석방 압력
영국 외교부가 베이징주재 공사에게 지시했다. "천유런의 석방을 위해 전력을 다해라. 국적이나 논조 따위는 거론할 필요 없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말만 강조해라."
베이징의 정세는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와중에 돤치루이가 실각했다. 얼떨결에 감옥 문을 나선 천유런은 베이징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예상은 했지만,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느냐. 서태후인지 뭔지, 맹꽁이 같은 아녀자가 휘저어 놓은 여파가 너무 가혹하다. 모든게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 때문이다. 한차례 뒤집어 엎지 않으면 중국은 희망이 없다." 남쪽의 혁명 세력에 투신하기로 작정했다.
쑨원은 제 발로 찾아온 천유런을 베르사이유 회담 남방 측 대표로 파견했다. 한 미국 역사가의 글을 소개한다. "천유런은 국제법의 대가였다.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조계(租界) 회수를 천명하며, 중국인 관할 하에 외국인이 참여하는 조계 운영을 주장했다. 내용이 어찌나 명쾌하고 선명했던지, 서구 열강은 외국인이 누리던 치외법권 취소의 전 단계인줄 알면서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중국 외교에 천유런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계속)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