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봉상왕이 고구려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히기는 하지만 의외로 재위 중반까지는 별다른 과오를 보이지 않는다. 294년 창조리를 국상(國相)으로 발탁하고, 창조리의 추천을 받아 고노자를 중용해 모용외(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초대 임금)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인사 운영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296년 8월). 문제는 봉상왕이 임금의 권위를 높이겠다는 이유로 궁궐 증축에 나서면서 벌어졌다. 298년 10월, 왕은 “궁궐을 늘여 지었는데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고 한다.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대거 공사에 동원되면서 괴로움이 더해갔지만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300년 8월, 봉상왕은 또다시 궁궐을 증축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지진 등 천재지변이 계속되고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지만 대규모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에 봉상왕에게 간언하고 나선 사람이 7년째 국상으로 재임하고 있던 창조리다.
왕 비위 방조했다면 참모들도 죄 있어 … 보스가 올바른 길 가도록 역할하는 게 진정한 참모
7년간 국상 자리 지켜놓곤 왕을 폐위한 창조리
창조리의 말을 들은 봉상왕은 진노했다.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 보는 존재인데, 궁궐이 장엄하고 화려해야 위엄을 세울 것이 아닌가?” 좋은 정치로 민심의 순응과 지지를 얻기보다는 외형적인 위세로서 백성의 복종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봉상왕은 “지금 국상이 나를 비방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칭찬을 듣고자 함인가?” 라며 창조리의 진심을 의심한다. 창조리의 간언이 임금을 위한 충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임금과 대척점에 섬으로써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창조리는 즉각 부인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인자하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길 건의하지 않으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신은 국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진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칭찬을 바라서이겠습니까.” 그러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다시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며 물리쳤다. 여차하면 죽일 수도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창조리는 봉상왕이 끝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심한다. 폐정을 종식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교체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창조리는 신하들을 규합해 봉상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켰고 왕을 폐하여 연금시켰다. 그리고 봉상왕에게 죽임을 당한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옹립하였는데, 이 사람이 미천왕이다. 300년 9월, 봉상왕과 그의 두 아들은 자결했다.
이상의 이야기를 보면 폭정을 휘두른 임금에게 간언을 해도 듣지를 않자 재상이 총대를 메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부득이 임금을 축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리는 봉상왕의 잘못을 직언함으로써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했고, 봉상왕은 창조리의 충언에 귀 기울기는커녕 오히려 협박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선악이 분명해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창조리의 행동이 옳기만 한 것일까?
왕 옆에서 호가호위한 책임져야
요컨대 봉상왕과 창조리의 관계는 보스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참모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참모라고 해서 보스를 무조건 추종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보스가 보스답지 못하고, 보스와 서로 뜻이 맞지 않는다면 보스의 곁을 떠나거나 심지어 대척점에 서게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이전에 참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스의 과오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멋들어진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