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앞둔 강진만은 풍요롭고 분주했다. 갈대밭이 마지막 황금빛을 토해내는 사이 갯벌에는 겨울 손님 큰고니가 내려 앉았다. 강진만 가운데 떠 있는 가우도에서 겨울 바람을 맞는 동안 아낙의 거친 손에서 바다를 먹고 자란 첫 굴이 꺼내지고 있었다. 백련사에서는 성미 급한 동백이 벌써 시뻘건 꽃을 피웠다. 남도 끝자락 강진 땅으로 겨울 마중을 다녀왔다.
가을과 겨울이 맞닿은 강진만
‘포구의 양쪽 갯벌을 따라 무성하게 펼쳐진 갈대밭이 3월의 바람결에 느리고 부드럽게 물결 짓고 있었다. 갯벌과 바닷물과 갈대가 어우러진 기나긴 포구 풍광은 언제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강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그 포구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강진만의 색다른 정취는 그 포구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소설 속 포구가 지금의 강진읍 남포마을(옛 남당포)이다. 지금 포구는 사라지고 없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진 간척사업의 영향이다. 하나 갈대만은 쓰러지지 않고 여전히 갯벌을 무성히 채우고 있다. 사실 강진만은 3월의 바람결에 갈대밭이 부드럽게 물결 지을 때보다, 누렇게 익은 갈대에 겨울철새가 내려앉는 이맘때가 훨씬 특별하다. 천연기념물 201호 큰고니의 집단 서식지가 강진만이다. 갈대꽃이 솜털 같은 씨앗 뭉치를 흩날리고 겨울철새가 갯벌에서 군무를 펼치는 장관을 함께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11월에서 12월 초까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순간의 분주함이 강진만 갯벌을 가득 물들인다.
겨울이 문턱까지 왔다는 증거는 만덕산(412m)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도 있었다. 겨울 즈음 꽃을 피워 봄에 만개하는 동백이 벌써 성미 급하게 피어있었다. 동백림 너머 오솔길에는 채 마르지 않은 단풍 낙엽이 수북했다. 1㎞ 가량의 오솔길을 올라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혼이 서린 다산초당에 들렀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돼 꼬박 18년을 살았다. 주막집에도 얹혀 살고, 보은산(273m)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도 쪽방살이를 했지만, 강진에서 가장 오래 머문 장소가 초당이었다. 다산은 다산초당에 틀어박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저작을 완성했다.
다산초당은 아직 가을에 머물러 있었다. 채 잎을 떨구지 않은 단풍나무가 초당 옆에서 멋을 부리고 있었다. 다산초당 한편의 천일각에 올랐다. 저 멀리 강진만이 은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해 질 녘 다시 갈대밭을 찾았다. 황금빛 갈대 위로 큰고니 떼와 청둥오리 떼가 숨가쁘게 움직였다. 강진만의 주인이 바뀌는 화려한 교대식이었다.
강진만 해안 나들이
찻길로만 보면 강진에서는 지름길이랄 게 딱히 없다. 기다란 강진만을 가로지를 길이 없으니, 강진만 서쪽 지역에서든 동쪽 지역에서든 반대편으로 이동할 때는 국도를 따라 빙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행이 강진 읍내와 동남쪽 끝자락의 마량항을 잇는 23번 국도가 빼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지루함을 덜어준다.
찻길에는 없지만, 걷는 길에는 질러가는 방법이 있다. 강진만 한가운데 떠 있는 섬 가우도에 육지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동서로 뻗어 있다. 가우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오른쪽 대구면 저두리를 잇는 다리가 438m 길이고 왼쪽 도암면 망호마을을 잇는 다리가 716m다. 두 다리를 아울러 가우도출렁다리라 부른다.
가우도는 강진만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지만 예부터 사람의 왕래는 많지 않았다. 뭍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섬사람은 뭍에 기대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2011년 다리가 놓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꼭꼭 숨겨 두었던 섬 풍경은 금세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지난해 가우도에는 관광객 40만 명이 찾았단다. 가우도 주민은 15가구에 4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가우도에 들었다. 저두리를 통해 바다 위를 두발로 걸어 섬에 다다랐다. 이름과 달리 다리는 출렁이지 않았다. 반갑게도 섬 안에 또 다른 길이 있었다. ‘함께해(海) 길’이란 이름의 해안 산책길이 섬을 둥글게 두르고 있었다. 2.5㎞ 거리여서 부담은 없었다. 바다에 시선을 맞추며 걷고 또 걸었다. 갯바위 위로 놓인 데크로드를 지나며 제법 찬바람을 맞았다. 이내 포근한 숲길이 나왔다. 흙길을 따라 후박나무니, 소나무니 푸릇푸릇한 상록수림이 이어졌다.
가우도에서 뭍으로 돌아갈 땐 출렁다리보다 빠른 길을 선택했다. 가우도 정상 청자타워에서 짚트랙(공중 하강 시설)을 타면 1㎞ 거리의 저두 선착장까지 1분 만에 도착한다. 줄에 매달려 날아가는 동안 발 아래로 강진만과 갈대밭 그리고 갯벌이 차례로 지나갔다. 구름다리를 건너 섬에 들어와 하늘을 날아 섬을 나가는 독특한 섬 여행이었다.
가우도에서 나와 미량항 인근에서 갯굴로 유명한 남호마을을 찾았다. 남호마을은 강진만 바다와 맞붙은 땅인데도 ‘남쪽 호수’란 이름을 고집한다. 바다를 향해 불쑥 튀어나온 땅이 무인섬 외호도와 내호도를 감싸고 있어 바다가 호수처럼 평온하다. 겨울에도 강진만에는 매생이·개불·낙지 등 다양한 먹거리가 올라온다. 그 선두가 이달부터 갯벌을 까맣게 뒤덮는 갯굴이다. 썰물이 되자 굴 캐는 할머니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나왔다. 열다섯 살부터 굴을 채취했다는 장경애(83) 할머니의 망에도 금세 굴이 한가득 담겼다. 할머니의 꼬챙이질 몇 번에 딱딱한 굴 껍질이 벗겨지고 뽀얀 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크, 굴 맛 시원하네이. 겨울이 왔어.”
여행정보
서울시청에서 전남 강진군청까지는 자동차로 약 4시간 30분 걸린다. 큰고니와 청둥오리는 보통 2월까지 강진만에 머문다. 남포축구장 앞 데크로드와 덕남리 철새 관찰지점에서 탐조가 수월하다. 가우도 짚트랙은 겨울에도 탈 수 있다. 오전 9시~오후 6시. 2만5000원.
강진 여행에서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강진읍에 ‘예향’ ‘다강’ 등 이름난 한식당이 몰려 있는데, 역사나 명성은 1981년 문을 연 ‘해태식당(061-434-2486)’이 우선이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백반의 진수를 보여주는 3대 한정식 집”이라고 소개한 곳이다. 반찬은 계절마다 다르다. 요즘은 생굴·산낙지·홍어삼합·불고기·육회·토하젓·갈치속젓 등 28개 반찬이 올라온다. 2인 6만원.
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