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시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의 한 대목이다. 미당이 묘사하듯 추석에는 일가 친척이 모여 송편을 빚고 서로 근황을 묻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차가 막히고 일이 많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앞으로 문학작품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추석=가족이 모두 모이는 대명절’이란 공식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피부관리 받거나 서핑 배우거나 해외로
50·60대도 친구들과 함께 여행 떠나
“1년 두 번 오는 조용한 도심 혼자 만끽” 65%
“고향 가더라도 당일치기나 1박2일” 50%
◆추석에 이렇게 놀아요
3년 차 증권맨 김상명(29)씨는 평소 콤플렉스였던 얼굴의 점들을 빼기로 했다. 피부관리숍에 들러 피부관리도 받을 생각이다. 부산에 있는 부모도 해외여행을 떠나 집에 갈 필요도 없다. 김씨는 “피부관리숍은 명절에도 대부분 문을 연다. 관리 후엔 쇼핑하면서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에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일도 흔하다. 화장품 회사에 재직 중인 박모(29·여)씨는 추석 연휴 앞뒤로 연차를 내고 9박10일간의 포르투갈 여행을 시작했다. 부모님과 동생도 일본 여행을 한다. 그는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두 달 전 과감히 비행기표를 샀다”고 말했다.
방송국 PD 강모(26)씨는 연휴 기간에 강원도 양양군 죽도해수욕장에 간다. 친구 두 명과 함께 서핑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는 “직업 특성상 친구들과 같이 휴가를 맞추기가 어렵다. 늘 배우고 싶었던 서핑을 접할 기회가 추석밖에 없다”고 말했다.
50~60대도 예외가 아니다. 직장인 이모(58·여)씨는 “명절 스트레스도 있고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굳이 차 막히는 명절에 내려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친구들도 10명 중 8명은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모(66)씨 역시 이번 추석에는 부인과 함께 4박5일로 전남 청산도로 여행을 떠난다. 대기업 홍보 업무를 하는 이씨의 아들(37) 역시 아내, 7살짜리 아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의 호텔로 여행을 간다. 이씨는 “아들 집도 차로 10분 거리고 평소 친인척들도 자주 본다. 차례도 지내지 않아 굳이 명절에 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추석에 이렇게 일해요
▶관련기사
① “어른들이 취직 안 하냐 물으면 회사 차려 달라고 대답할 것”
② 미국인 62%도 추수감사절 스트레스, 가장 큰 이유는 돈
시험준비나 취업준비에 매진하는 청춘 중에도 추석을 포기한 이가 많다. 취업준비생 한솔(24·여)씨는 “하반기 공채도 있고 지난 2월에 졸업했는데 아직 취업을 못해서 고향에 내려가는 게 부담스럽다”며 “추석에는 신촌 카페에서 같은 스터디원들과 함께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준생 입장에서 명절은 즐겁다기보다 부담스러운 날”이라고 덧붙였다.
채승기·윤재영 기자 ch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