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영화는 사람(귀신·좀비·도롱뇽이 아니다)이 죽고 사는 문제를 다뤘다. 공히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죽거나 죽을 위험에 놓인 사람에게 그 일을 당해야 할 마땅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생사의 기로에 섰다. 연출력 덕에 관객은 자신이 그 속에 있는 것으로 느낀다. 애를 태우고 용을 쓴다.
기자는 영화 보기가 더 힘들다. ‘곡성’에서 신문은 경찰의 어설픈 수사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무뇌적’ 존재다. ‘부산행’에서 언론은 좀비를 폭도라고 보도하며 진실과 괴담을 맞바꾼다. ‘터널’에는 조난자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도 경쟁에만 매달리는, 몰상식한 기자가 떼로 등장한다. ‘내부자들’에서 최고조에 달한 영화의 언론 힐난은 이렇게 이어졌다.
1960년대에 프랑스 영화의 ‘새 물결’(누벨바그)을 주도한 장뤼크 고다르 감독은 “영화는 24배로 불어난 진실”이라고 말했다. 1초당 24장의 사진(필름)이 영사기에 비쳐 나타나는 영상은 과장·비약이 있지만 사실을 투영한다는 의미다. 이에 따르면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현듯 삶의 위기에 봉착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 정신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불안함과 고단함이 영화를 통해 ‘증강현실’이 됐다. 기자와 언론에 대한 불편한 묘사도 실재하는 불만의 증폭(과도하다고 믿지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5일 공개한 자료에 한국인 평균 노동시간이 회원국 중 둘째(첫째는 멕시코)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수준은 34개국 중 22위였다. 여가 시간이 적고 소득이 많지 않으니 두세 시간짜리 놀이터인 극장으로 몰린다. 스크린은 현실만큼 ‘하드코어’인 영화가 점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현실적 작품이 돼 외면당한다. 우리는 과연 이 고된 극장의 터널에서, 증강현실의 살벌한 화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상언 사회2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