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릴레이 16] 윤화영이 박우수에게

중앙일보

입력 2016.06.13 00:46

수정 2016.06.13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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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음식에 담긴 인연과 철학, 셰프가 주목하는 또 다른 셰프를 통해 맛집 릴레이를 이어 갑니다. 

윤화영 셰프

음식은 수학처럼 암기할 게 많다. 하지만 암기만으론 되지 않는 것도 수학과 비슷하다. 『음식의 정석』(만약 그런 게 있다면)을 펴놓고 밤새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데이터를 쌓았다가 필요한 순간 얼마나 잘 기억해 내고 활용하느냐가 요리사의 실력을 가른다.

우리 집엔 요리책만 2500권쯤 있다. 쉬는 틈틈이 찾아보며 재료별로 레시피를 정리·종합한다. 요리를 예술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 자신은 한 번도 예술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예술가도 테크닉을 익히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나의 바람은 좋은 기술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기술만이 손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장난이나 편법으로 얻을 수 없다.

무심한 듯 숙련된 손놀림으로
스시 칼집 간격까지 맞춤 서비스
손님이 먹는 건 음식 아닌 진심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오히려 쉽다. 문제는 대중을 상대하는 레스토랑에서 어떤 음식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초 나흘 연휴 때 ‘메르씨엘’(부산시 해운대)에 1150명이 방문했다. 과연 이 아이디어와 재료로 이 많은 손님에게 충분히 서비스할 수 있는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이런 직관은 차곡차곡 암기된 학습에서 나오고 그걸 발휘하는 게 연륜이고 경력이다.

강민구 셰프(‘밍글스’)가 프랑스에서 일하던 내 모습이 롤모델이었다 했지만, 나 역시 누군가 깔아 준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본지 5월 30일자 20면 셰프릴레이 15회>

특히 100여 년 전 요리노동자로 파리에 먼저 발 디뎠던 일본인들의 힘이 컸다. 거의 모든 주방에서 일본인과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근면하고 투철한 직업 정신에 감화됐다. 일본인이 아시아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준 덕에 한국인인 나도 순탄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아오모리’의 스시 모둠

 
 

박우수 셰프

개인적으로 워낙 스시(초밥)를 좋아해 ‘메르씨엘’이 쉬는 월요일엔 점심 먹으러 스시집을 자주 간다. 해운대 센텀호텔 일식집 ‘아오모리’다. 아담한 규모의 식당에 들어서서 스시 카운터로 향하면 약간은 긴장한 듯 반듯한 모습의 박우수 실장이 맞아 준다. 2008년 문 연 이래 늘 실장이다. 오너셰프이면서도 사장이라 하면 손님에게 거리감을 준다고 이 직함을 고수한다. 티끌 하나 없이 청결한 히노키(노송나무) 도마에서 한 치 오차 없는 손놀림으로 생선살을 뜬다. 무심한 듯 숙련된 동작으로 두툼한 스시를 쥐어 접시 위에 올려 준다. 입에 넣는 순간,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이 사람의 진심이구나 싶다. 손님을 주시하고 있진 않지만 턱과 치아의 미세한 움직임을 기억했다가 다음 스시 때 더 편하게 먹을 수 있게 칼집 간격을 배려하기도 한다. 철마다, 날마다 바뀌는 생선을 꿰고 있지 않는 한 어림없는 섬세함이다.


서울에 정말 좋은 스시집이 많다. 어쩌면 트렌드는 서울이 앞설 것이다. 박 셰프의 스시는 말하자면 클래식한 느낌이다. 대신 ‘1대1로 서비스하는 음식’으로서의 스시의 본질이 배어 난다. 언젠가 꿈을 여쭤 보았다. “지금 60석 정도인데 나이 들면 이 규모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좀 작은 규모의 스시전문집을 차려 모든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고 싶어요.”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는 요리사를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정리=강혜란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