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교부의 행보는 정반대다. 임기 초에는 미국 시민권자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임명하는 등 파격적 인사정책을 과시하던 박근혜 정부가 최근 자녀들의 국적 문제를 들어 해외 공관장 세 사람을 소환 조치했다. 같은 이유로 외교부 일부 고위직 당국자에게도 인사상 불이익을 주었다는 이야기 역시 들린다. 외국 국적을 취득했거나 이중국적을 보유한 건 그들의 아들이 아니라 딸들이었다. 예전에 흔히 있던 병역기피를 위한 국적 취득 케이스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불이익은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들 외교관 자녀의 해외 국적은 원정출산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부모가 해외 임지에서 근무하던 중에 태어났을 따름이다. 이들이 장성한 뒤 자신의 선호와 편의에 따라 외국국적을 취득한 것을 두고 부모의 책임을 묻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자신의 선택으로 부모가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들은 또 무슨 죄인가. 내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너는 절대로 외국 국적을 취득해선 안 된다고 말하게 될 무수한 외교관들 입장은 어떨까. 정부가 이런 비극적 선택을 강요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가정 파괴범’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정부 당국자 모두가 같은 잣대로 처분을 받았을까. 청와대 수석을 지내다 국회의원으로 발탁된 사람, 현직 부총리 중 한 사람, 그 밖에 다수의 정부 고위인사들의 자녀가 국적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 중 누구의 자녀도 문제 삼은 일이 없다. 오로지 외교부 관료들만 대상이다. 부하직원이라야 3~4명이 전부인 재외공관 공관장의 임무와 책임이 청와대 수석이나 부총리보다 막중하다고 믿는 것일까. 결국 레임덕 정국에 힘없는 외무 관료들만 희생양 삼았다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정부의 처사가 배우자나 자녀의 국적 문제에 갈수록 관대해지는 국제사회의 흐름에 크게 역행한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의 이국적, 동성 결혼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보다 국적주의를 한층 더 강조하는 일본에서조차 외국인 부인을 둔 인물이 외무성 사무차관까지 지낸 바 있다. 아예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서는 대통령 같은 고위직에게도 이중국적이 허용되고 있다. 하물며 배우자 또는 자녀의 국적 문제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우리 정부의 관행은 다분히 시대착오적 처사라 하겠다.
이는 비단 세계화, 다문화 사회의 확산 때문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중국적 보유를 국력 신장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민정서에 반할지 모르지만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이고 본인의 이중국적 보유나 타 국적 획득을 배신행위로 보지는 말자는 뜻이다. 이제는 그게 특권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였던 아웅산 수치가 대통령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배우자나 자녀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때문이었다. 이를 비판했던 한국 언론 누구도 외교관들이 받은 난데없는 고통에는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부인이 외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한국의 국적주의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