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포에서 4선을 하면 그건 월급쟁이다.”
3년 전인 19대 총선 당시 3선(16~18대)을 한 지역구(군포)를 포기하고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에 출마했던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대구 수성갑 지역위원장) 전 의원이 한 말이다. 하지만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대신 지역주의 도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20대 총선 ‘재수’에 나서면서 『우리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더난출판)란 정치 토크집을 냈다.
정당 질서에 구애 안 받는 온건·합리적 정치그룹 만들 것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선 “정치권 선무당들은 손을 떼고 전문가·역사학자들의 대토론회에 맡겨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을 교육한다고 하는 여당 주장은 턱없는 얘기고 친일논쟁, 박정희 대통령 미화논쟁으로 몰고 간 야당 지도부는 사려 깊지 못했다”고 여야를 질타했다.
- 멀쩡한 지역구를 놔두고 대구에 출마한 게 정치생명 연장을 노린 정치쇼란 시각도 많다.
“배지 다는 게 목표라면 왜 대구로 갔겠나. 나는 국회의원으로 살아남았지만 응어리를 풀지 못한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 나를 움직이게 한 거다. (19대 총선에서) 대구 시민들이 한 30% 줬으면 포기했을 텐데 40.4%를 주셨다. 도망가면 내가 나쁜 놈이 된다.”
- 내년에 당선되면 정당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정치그룹을 만들겠다고 밝혔는데.
“대구·경북에서 한두 명 야당 후보가 되고 저쪽에서 이정현 의원 등 몇 사람이 당선된다면 국민이 ‘더 이상 지역주의를 갖고 우리들 삶을 선동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낸 것으로 봐야 한다. 청년실업, 고령화, 성장동력을 잃은 경제, 제 방향을 못 찾고 있는 복지 시스템 등에 대한 답을 내는 데 경상도·충청도·전라도가 다르지 않다는 사인이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하는 여야의 세력을 모아 의견그룹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 신당을 만들 건가.
“정당으로까진 생각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정당 질서에 구애받지 않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정치의견그룹부터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정당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 유사한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실패했다.
“과거엔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스들의 힘이 너무 세 (통합론자들이) 번번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이제 빅보스도 없고 지역 문제도 옅어져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 이번엔 성공할까.
“안철수 현상이 꺼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안철수 의원이 이걸 제대로 거둬 성과물을 못 낸 채 정치권에 들어왔지만 10%대의 지지가 나오는 건 그 기대나 꿈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중간지대에 저처럼 고민하는, 온건·합리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다만 공천이나 당선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입을 다물고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 지역주의에 도전해 성공 신화를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롤 모델인가.
“저와 달리 그분은 철저하게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도전하고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열정 덩어리의 매력이 있다. 저는 답답하다고 할 만큼 신중파다. 젊을 때 학생·재야운동을 하면서 열정으로 세상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책임감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게 저를 늘 짓누르고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신중해지게 됐다. 그러나 한번 움직이면 반보나 한 보 정도 세상의 변화를 만들고 싶다.”
- 노 전 대통령과 다른 점은 뭔가.
“노 전 대통령이 진보의 가치에 자기를 던졌다면 나는 진보라기보다 양쪽의 공존,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존을 통해 미래를 열 수 있다는 데 방점을 두고 싶다. ‘노무현 방식’은 내 스타일이나 삶의 태도와 안 맞는 것 같다. 나는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상생·공존을 얘기한다. 당장은 인기가 없더라도 언젠가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다.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제 스스로가 비주류 의식은 없다. 그러니까 보수에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같은 합리적 지도자가 나오니까 대단히 기쁘다. 내가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보수가 책임지고 짐을 지고 갈 생각을 해라. 남북 문제도 진보정권이 아니라 보수정권에서 한 단계 진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5000만이 내부 갈등 없이 합의할 수 있다’는 거다.”
- 노 전 대통령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같은 인내와 치밀함이 있었더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양반이 의욕은 대단히 앞섰지만 현실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 관료들을 추동하는 과정, 지지자와 지지자 아닌 사람들을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이 일방적이었다.”
- 당선되려면 야당보다 무소속이 낫지 않나.
“많은 사람이 ‘당을 잘못 선택했다. 무소속이면 무조건 된다’고 말씀한다. 나도 왜 그런 갈등이 없겠나. 우리 당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매일 등에 칼을 꽂는 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30~50대를 만나보면 이 사람들이 김부겸에게 요구하는 게 있다. 하나는 30년 동안 맹목적으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줬는데 전국에서 가장 힘든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바꾸고 싶다고 하는 정당한 분노다. 또 하나는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싶은 거다. 대구는 야당이 당선될 수 없는 지역이 아니라는 걸 보이고 싶어한다. 그분들에게 새정치연합이든 민주당이든 관계없다. 기존 질서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야당 후보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 기대를 저버릴 순 없지 않나.”
- 당선을 확신하나.
“표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19대 때는 캠페인 자체가 힘들었다. 명함을 주면 면전에서 ‘빨갱이당 아니야’ 하면서 집어던지고 찢어버리니까. 나야 참을 수 있지만 선거 도와주러 나온 딸(배우 윤세인)은 울어버렸다. 요즘엔 저녁에 술집 가면 내가 짱이다. 내 얼굴 알아보고 다가와서 술 주면서 ‘요번엔 바뀌어야 됩니다’라고 격려해준다.”
30년 가까운 김 전 의원의 정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통합’이다. 학생운동(서울대 정치학과)을 하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계기가 된 게 1987년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단일화 실패였다. “이때 받은 좌절과 충격이 너무 커 내가 직접 해보자”고 맘먹었다. 이듬해 총선에서 장을병·제정구 전 의원 등이 이끌던 한겨레민주당으로 서울 동작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두 번째 시련은 통합추진회의(통추)의 해체였다. 통추는 95년 DJ가 정치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야권분열 반대,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고 결성된 모임이다. 그러나 3김의 지역분할 정치에 함몰, 97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김정길 전 의원, 유인태·원혜영 의원 등이 DJ 지지를 선언하면서 해체됐다. 그는 “양쪽 빅보스들이 너무 세니까 결국 우리가 스스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몌별(袂別·도포 자락을 찢으면서 헤어지는 것)의 아픔으로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빈민·인권운동가인 제정구 전 의원에게서 자극과 가르침을 받는다. 이어지는 회고.
“제 전 의원은 설움과 배신을 당하면서도 다 이겨냈고 끊임없이 자기를 다스려온 치열한 인간이고 큰 그릇이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강연에서 ‘죽을 날이 가까워오니 그동안 의미 없이 스쳐가던 것들이 다 새로워 보인다. 사람과 사물이 서로 극복될 존재가 아니라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 서로에게 존재의 틀을 만들어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말을 남겼다. 이 예언적인 말이 내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 전 의원에게 어떤 지도자를 꿈꾸고 있는지 물었다. 선문답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분단의 책임이 미국이냐 소련이냐를 놓고 좌우 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혜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7년 무장투쟁의 지도자인 만델라(전 남아공 대통령)는 백인들을 감옥 보내는 대신 사면해줬다. 만델라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올까 감탄한다.”
[S BOX] 문 대표 절박함 못 느껴 … 비주류 만나 필요한 것 수용해야
김부겸 전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친노-비노 갈등에 대해 일침을 가하며 ‘공존의 길’ 모색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야권 전체를 다 합쳐 최대 지지를 받았을 때도 35% 득표를 넘은 적이 없다”며 “이러다가 야당이 다 망하고 나면 누가 책임질 것인지 정말 두렵다. 일본 아베의 자민당이 브레이크 없이 쭉쭉 나가는 것처럼 한국 사회가 급격하게 보수 일로로 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느냐”고 했다.
- 친노 패권이 문제라고 보나.
“꼭 그렇게만 볼 순 없다. 안철수-김한길 체제에선 왜 일패도지했나. 근본적으로 우리 당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으면 책임감·진정성·끈질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지 않나. 그러니까 우리를 정치자영업자 조합이라고 비아냥대는 것 아닌가.”
- 통합전당대회를 열어 지도부 선출을 다시 하자고 했는데.
“야권의 세력을 하나로 끌어모으려면 통합전대라는 하나의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이걸 문재인 권력을 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치나. 또 문재인 대표와 친노가 동의 안 하는데 일방적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지 않은가.”
- 문 대표가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의 친노들을 물리치고 좋은 사람들을 기용하라고 하는데 왜 못하나. 그 정도 수준 가지고 어떻게 총선을 치르나. 문 대표가 절박함을 잘 못 느끼는 것 같다. 문 대표 주도하에 비주류, 장외 인사들을 접촉해 보고 감당할 것과 못할 것을 정리하고 나서 감당 못할 것이라도 야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도 못하겠다고 하면 문 대표 책임을 물어야 된다. 문 대표만으론 돌파가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문 대표 없이는 되나.”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