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다만 여기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우선 설계도, 다시 말해 유전 정보가 있어야 한다. 설계도가 없다면 바이러스 합성은 불가능하다. 고려대 의대 박만성(바이러스학) 교수는 “바이러스 합성은 현재 기술로 가능하지만 유전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고 말했다.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재난 영화 ‘아웃브레이크’.
메르스 바이러스는 2012년 최초로 발견된 뒤 유전 정보 분석이 끝났다. 현재 기술로 메르스 바이러스의 실험실 합성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미국 정보기관 CIA가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음모론에 휩싸인 에볼라와 에이즈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다. 에볼라는 70년대 중반 처음 발견됐고, 에이즈는 80년대 학회에 보고됐다.
그렇다면 유전자 정보가 없다면 메르스나 에볼라 등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설계도가 없는 시절에 새로운 바이러스를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정답은 불가능이다.
거대 제약사가 약 팔려고 바이러스 만들었다?
음모론에 맞선 과학
또 다른 전제도 있다. 바이러스 합성을 위해선 특수한 연구시설이 있어야 한다. 고병원성 바이러스 연구를 위해선 생물안전 3등급(BL3) 이상의 연구시설이 필요하다. 바이러스가 외부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공기를 태워 내보내는 특수 시설이다. 고려대 박만성 교수는 “바이러스 합성 과정에선 감염력을 상실한 결손 바이러스가 생산되는 등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바이러스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단순히 염기를 어이 붙이는 작업만으로는 장비가 갖춰져 있더라도 바이러스 합성은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CIA가 아프리카 인구 조절을 위해 에볼라와 에이즈 바이러스를 최초로 만들어 퍼뜨렸다”는 음모론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이러스·세균=우선 크기가 다르다. 일반적인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1000배 정도 작다. 바이러스는 120여 년 전 담배 잎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찾아냈다. 1892년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이반노프스키는 담배모자이크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다 세균보다 작은 존재를 확인했다. 세균 크기 물질을 걸러낼 수 있는 여과지를 통해서도 담배모자이크병 확산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세균 여과기를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여과성병원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30년대 무렵 바이러스가 단백질과 유전자로 이뤄진 단순한 형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바이러스는 세균이나 세포 등 숙주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만 지니고 있을 뿐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포 및 세균 내부로 침투해 각종 효소와 에너지원을 이용해 복제한다. 이런 이유로 에이즈 바이러스는 면역을 담당하고 있는 T세포를 숙주로 삼기 때문에 감염되면 면역 기능이 약해져 바이러스가 아닌 폐렴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바이러스는 유전 정보 종류에 따라 DNA와 RNA로 나뉜다.
염기=유전자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인 핵산을 말한다. DNA는 A(아데닌), G(구아닌), C(시토신), T(티민)의 네 가지 염기가 조합돼 만들어진다. 인간 유전자는 이들 네 종류의 염기 30억 개가 일정한 순서로 늘어서 있다. 염기 서열에 따라 키와 피부색 등 생물학적 특성이 결정된다.
합성생물학=실험실에서 유전 정보를 이어 붙여 생명체를 만드는 학문이다. 1989년 미국 시나이 병원 피터 팔레스 교수 등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를 바꿔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 수 있다는 논문에서 출발했다. 이후 99년 독감의 원인이 되는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 합성에 성공했고, 2002년 미국 뉴욕주립대 에카드 위머 교수 연구팀은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합성해 쥐에게 주입해 바이러스 생존을 확인했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