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비 맞는 백발 감독, 어느 선수가 안 따르겠나

중앙일보

입력 2015.08.11 00:29

수정 2015.08.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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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감독은 폭우가 쏟아져도 비를 맞으며 서서 선수들을 독려한다. 혼신을 다한 지휘로 선수들의 투쟁심을 높인다. 지난 1월 26일 아시안컵 준결승전 당시 비에 흠뻑 젖은 슈틸리케 감독. [시드니 AP=뉴시스]

유대우 대표팀 단장
“슈틸리케 감독이 지휘관으로 전쟁을 이끈다면 부하들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다.”

 유대우(63) 2015 동아시안컵 대표팀 단장(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대회 우승을 이끈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도자로서 마지막 팀 혼신 다해
아시안컵때 비 맞아 감기 들기도
부상 당한 여자팀 심서연에게
위로 화환 보내며 "내 이름은 빼라"
강호들과 붙는 월드컵 예선 앞둬
골 결정력 부족 등 과제도 남아

 육군 사단장(소장) 출신 유 단장은 지난 1월 호주 아시안컵에 이어 중국 우한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단장을 맡았다. 슈틸리케를 가까이서 지켜본 유 단장은 10일 “군대 지휘관으로 본다면 지장(智將)·용장(勇將)·덕장(德將)의 모습을 골고루 갖췄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동아시안컵에서 중국(2-0승)과 일본(1-1무), 북한(0-0무)을 상대로 1승2무를 거뒀다. 찜통더위 속에서 일주일간 세 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고려해 1·3차전에만 정예 멤버를 기용했다. ‘일본에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국민 정서에도 불구하고 한·일전에 주전 9명을 뺐다. 결국 결과로 자신이 지혜로웠음을 증명했다.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휴식일 선수들은 쉬게 하고 자신은 숙소에 틀어박혀 비디오 분석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경기를 치른 뒤 슈틸리케 감독의 와이셔츠는 늘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유 단장은 “감독님은 경기 중 비가 쏟아져도 우의를 입지 않는다. 선수들과 똑같이 비를 맞으며 함께 뛴다. 아시안컵 때 비를 너무 맞아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며 “일본 감독(할릴호지치)은 비를 피해 벤치 안에만 앉아있더라”고 말했다. 이어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 전 선수들에게 ‘유니폼에 새겨진 호랑이 마크(축구 대표팀 엠블럼)는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호랑이처럼 상대를 제압하고 포효하자’며 선수들 투쟁심을 끌어올렸다”며 “1954년생인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팀이 지도자로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혼신을 다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10일 동아시안컵 우승 메달을 걸고 귀국한 남자 축구 국가대표 선수단. [인천공항=뉴시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9일 동아시안컵 마지막 경기인 중국-일본전 하프타임 때 선수단 마지막 미팅을 제안했다. 중국이 일본에 비기거나 져야 한국이 우승할 수 있는 상황. 그는 선수들에게 “우리가 우승할지, 준우승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건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줬다는 점이다. 난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여러분이 잘해줘 K리그가 잘 되는 게 내 목표다”고 말했다.

 유 단장은 “무뚝뚝한 독일 할아버지 같지만 다정다감하다. 선수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지도자”라고 슈틸리케의 스타일을 설명했다. 동아시안컵 도중 부상으로 낙마한 여자 대표팀 심서연(26·이천대교)까지 챙겼을 정도다.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심서연에게 위로의 화환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단 자신의 이름은 빼고 ‘남자 선수단 일동’으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며 “군대에서 지휘관이 진심을 보여주면, 병사들도 진심으로 화답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을 잘 어루만져 준다”고 말했다.

 외국 기자들도 슈틸리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영국 출신 베테랑 축구해설가 존 헬름(73)은 “슈틸리케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감독”이라며 “중국을 상대로 단 하나의 문제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교체 타이밍 등을 보면서 팀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중국 국영방송 CCTV의 왕난 기자는 “슈틸리케는 국내파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절박함을 이끌어냈다. 국내파들은 유럽파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LETV의 첸이통 기자는 “한국 감독은 경기장에 입장하는 선수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더라. 선수들과 스킨십을 통해 믿음을 심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 부임 후 A매치 12승3무3패를 기록 중이다. 세계적인 강호와 제대로 맞붙지는 않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을 앞두고 골 결정력 부족, 유럽파와 국내파 조화 등 과제도 남아 있다. 10일 귀국한 슈틸리케 감독은 “동아시안컵 우승을 통해 팀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면서도 “슈팅 과정에서 마지막 순간 냉정해져야 한다. 기술적인 면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한=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