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경 미국 바이오기업인 ‘시터스’社의 멀리스 박사는 유전자 한 개를 수십억 개로 증폭시킬 수 있는 PCR 기술을 개발하여 199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 후 이 기술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지금은 수많은 질환의 진단과 예측에 사용되고 있다. 안젤리나 졸리를 ‘선제적’ 유방절개 수술로 이끈 것도 PCR 분석 결과이다. 바이오 연구와 의료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혹자는 바이오테크의 역사를 PCR 기술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영향력이 큰 발명이다.
1991년 로슈社는 ‘시터스’社에 3억불을 지불하고 이 기술을 사들여 상용화하여 2005년에 특허가 만료될 때까지 거의 15년 동안 독점적으로 사업하며 수십억불을 벌었다. PCR 특허는 일종의 원천기술 성격의 아이디어 특허였기 때문에 로슈社는 유전자를 증폭하는 모든 경우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여 강력하게 시장을 모니터하며 독점력 유지를 위해 소송도 불사했다. PCR 관련 시장 규모는 현재 10조원을 넘는다. 우리나라의 코스닥 상장업체 B사와 C사도 PCR에 필요한 작은 기술 하나로 수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멀리스는 가구판매업자인 아버지와 부동산중개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4년 태어났다. 그는 28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2년간 연구원으로 일하다 집어치우고, 소설을 쓰다가, 다시 빵가게를 열었다. 그러다가 1979년, 유전공학 기업인 시터스社에 입사하여 DNA 조각을 합성해 주는 사실상 테크니션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1983년 어느 봄날 밤, 여자 친구와 함께 자기 오두막 집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DNA 증폭 아이디어가 떠올라 실험에 착수했다.
자유인이라고 할까 방랑벽이 있다고 할까. 멀리스는 PCR의 상업적 가치가 불투명할 때인 1986년에 시터스를 떠났다. 로슈가 PCR 기술을 사들인 후 나중에 그가 회사로부터 받은 보너스는 1만불이었니 PCR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시터스에서 나온 후 그는 사실상 실험과학계를 떠났다. 수상 후에는 노벨상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하여 컨설팅과 강연 등으로 돈을 벌었다.
멀리스는 매력(charming)과 난폭(abusive)이 교차되는 인물로서 그의 기행은 전설적이다. 노벨상을 받으러 간 스톡홀름에서 레이저 포인터를 행인에게 휘두르며 장난하다가 구속될 뻔 했고, 일본에 가서는 천황 부인에게 “자기야(스위티)”라고 불러 주변을 놀라게 하고, 초청 받은 학회의 강연에서 누드 여인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HIV는 에이즈바이러스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멀리스는 운전하다가 나온 아이디어로 노벨상을 받기까지 불과 10년이 걸렸다. 많은 연구 성과들이 공개발표된 후 수십 년 후에나 그 업적을 인정받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로 파격적인 속도이다. 멀리스의 수상은 동료들의 도움과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멀리스를 시터스로 데려오고, 그의 상급자로서 PCR 연구를 촉구했으면서도, PCR 발명에 대해 어떠한 공로도 개인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던 토마스 화이트는 리더쉽의 전형을 보여준다. 노벨상 수상에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만이 아니라, 창의적 괴짜를 수용하는 문화와 그가 클 수 있는 환경 즉 인프라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