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 한자 성경 120만 자, 4년간 붓으로 새기다

중앙일보

입력 2015.05.25 00:01

수정 2015.05.25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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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은 밴쿠버 메이플리지에 자리한 집 작업실에서 새벽 5시에 글씨 쓰는 일로 하루를 연다.
그는 자신이 쓰는 붓글씨를 무심필(無心筆)이라 했다. 잘 쓰겠다는 욕심 없이 손 가는 뒤를 마음이 좇아 흰 종이와 검은 글씨가 놀게 뒷바라지한다는 뜻이다. 4년여에 걸쳐 5000여 시간을 들여 총 120만 자로 한자 성경 신약과 구약을 완서(完書)한 춘강(春江) 서정건(78)씨는 “다 쓰고 붓을 던진 나 자신도 놀랐다”고 회고했다. 잘 나가던 회사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쉰여섯 장년기에 사남매를 이끌고 캐나다로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막막했던 이민생활의 시름을 한 자 한 자 글씨로 눅이며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되새김질했다.

 “한국전력에서 일하며 나름 전문성을 인정받았고, 자립해 차린 대화기술단도 보람 있는 일터였지만 뭔가 인생의 핵심이 빠져있다는 안타까움이 낯선 땅으로 제 등을 떠밀었죠. 서예는 그 공허함을 메꿔준 나의 반려랄까요. 글씨는 손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니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이 있으면 절로 즐거워 붓으로 써봅니다.”

78세 캐나다 교포 서정건씨, “지인들은 기네스북 올리자 성화”

 춘강의 성경 완서 얘기를 듣고 서예계의 원로 김응현(1927~2007) 선생이 “당신은 이제 명필이오. 글씨를 100만 자쯤 쓰면 글씨에 통달했다 봐야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춘강은 자신을 서예가가 아니라 ‘서가(書家)’라고 부른다. 그는 “자식들에게 좋은 글 한 구절이라도 써서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각오였는데 아직 애들에게 글씨 한 폭을 써주지 못했다”며 “글씨에도 철이 들 때가 되었나보다”고 웃었다.

 춘강은 지난해 ‘부모은중경’을 일필로 쓴 데 이어 노자의 ‘도덕경’ 대필(大筆)에 들어간다. 내년쯤 귀국해 그간 쓴 글씨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성경 완서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리자는 지인들 성화를 말리는 중이다.

 “옛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선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먼저 기쁘고, 기이한 글을 보면 손으로 써보고 싶다. 지금까지 좋은 글을 골라서 내심 즐겁게 한 3000여 점 썼는데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글·사진 밴쿠버(캐나다)=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