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박정희시대] 16.수출 제일주의

중앙일보

입력 199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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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64년 8월 어느날 오후 부산시범일동의 신발 생산업체 국제고무 사장실. 공장 한 구석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공간은 요란한 기계소리와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로 가득찼다.
허름한 탁자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입씨름을 계속했다.
양태진 (梁泰振.작고) 사장과 수출 독려차 서울에서 내려온 박충훈 (朴忠勳.78.산업개발연구원장) 상공부장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공업1국장이었다.
"梁사장, 금년에 얼마까지 수출할 수 있다는 거요. "
吳국장이 추궁하듯 물었다.
"우리 회사 사정상 도저히 30만달러는 불가능합니다.
5만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같습니다."
梁사장이 하소연하듯 대답했다.
두 사람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자 가만히 듣고 있던 朴장관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梁사장, 회사 사정도 있지만 정부 방침도 있고 하니 금년에는 10만달러 수출하는 걸로 합시다." (오원철씨 증언)
64년 5월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朴장관은 '수출만이 살 길' 이라며 수출증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주요 수출업체들을 직접 방문하고 나섰다.
朴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달러 부족으로 좌초될 위기에 몰리자 달러 확보를 위해 수출관계 장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장관 박충훈씨는 "朴대통령은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그 밑의 참모장격이었다" 고 회고했다.
그가 언제부터 수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지, 그의 이런 태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는지 증언을 통해 점검해 보자. 먼저 60년대에 상공부차관과 두차례의 상공부장관, 부총리겸 기획원장관을 지낸 박충훈씨의 증언. "61년 8월 내가 상공부차관에 임명됐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상당수 최고위원들은 수입대체산업 육성방안을 선호했고 상공부는 수출에 역점을 두자는 입장이어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朴의장 앞에서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을 때 朴의장은 상공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5.16직후부터 수출에 중점을 뒀다는 얘기다.
60년대 재무.상공부 장.차관을 지냈고 69년부터 78년까지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경제를 챙긴 김정렴 (金正濂.73) 씨의 증언은 다르다.
"64년 6월 내가 상공부차관에 취임했을 당시에는 고평가 된 환율과 차별관세.저금리등에 의한 안이한 이득 때문에 수출보다 수입이나 수입대체산업이 유리해 수출산업은 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상공부 국장단회의 때마다 수입대체공업에 대한 보호정책에서 벗어나 수출지향공업화의 길로 가자고 역설했습니다."
60년대에 상공부 화학과장.공업1국장.차관보를 거쳐 청와대 경제2수석을 역임한 오원철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박충훈장관이 취임 하루전에 나를 불러 중점을 둬야 할 업무에 대해 묻기에 '외화고갈과 경제파탄을 막기 위해서는 수출밖에 해결책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朴장관은 취임직후 나를 경공업담당인 공업1국장에 임명했지요. 그래서 수출 주종품목이 될 수 있는 경공업으로 공업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지요. "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박정희는 5.16직후부터 수출에 관심을 둔 것은 사실인 것같다.
그러나 공장건설을 위한 재원고갈과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구조에 대한 한계등을 절감하면서 64년을 기점으로 수입대체에서 수출로 무게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경제개발과 공장건설에 쓰일 재원조달을 위해 군사정부는 5.16직후 부정축재자로 몰아 헌병사령부에 수감했던 대부분의 기업인들을 활용할 궁리를 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이었던 김용태 (金龍泰.71.전공화당 원내총무) 씨의 증언. "최고회의에서는 기업인들이 국민의 혈세를 착취했다며 사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나마 생산경험.자본.기술이 있는 이들을 활용해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 는 각서를 쓰고 기업인들이 7월14일 풀려났다.
이어지는 김용태씨의 증언. "울산공업센터를 만들기 전인 62년 1월2일로 기억합니다.
'박정희의장과 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갈테니 당신들이 먼저 가서 타당성을 조사해 브리핑 자료를 만들라' 며 기업인들을 내려보냈지요. 그런데 이들은 천안에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이들의 울산행을 '부정축재자들의 집단 탈출' 로 알았던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 로 규정된 기업인들은 점차 수출과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탈바꿈한다.
이 시기의 박정희의 초조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61년 7월부터 64년 5월까지 2년10개월동안 경제기획원장관을 일곱번이나 갈아치운 것이다.
경제총수의 수명이 평균 5개월을 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후의 경제장관이나 참모들이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장관을 교체해 보고 국내 기업인을 동원해 봐도 부족한 재원을 메울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朴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64년 5월 경제기획원장관에 장기영 (張基榮.작고.전한국일보 회장) 씨,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각각 임명했다.
장기영장관은 뱃심이 좋아 별명이 왕초였다.
그는 취임 직전 朴대통령을 찾아가 "경제는 일사불란해야 합니다.
부처별로 고집을 세우면 배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인사권을 갖고 경제관계 장관들을 관장해야 합니다" 고 건의해 실질권한을 갖는 부총리가 됐다.
朴장관은 9개월만에 상공부장관에 재기용됐다.
그 무렵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제가 어느 날 朴장관께 '수출제일주의라는 용어를 어떻게 생각해 내셨나요' 라고 물어보았죠.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당장 수출을 하려고 해도 수출용 원자재를 구입할 달러가 없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자나깨나 문제는 항상 달러였다.
64년 당시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기존의 원조자금마저 급격히 줄여나갔다.
일본과는 국교수립조차 안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할 수 없이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64년 12월 朴대통령은 수출용 원자재 구입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달러를 구하러 서독을 방문했다.
전세기를 동원한다는 것은 꿈도 못꿨다.
서독에서 보내준 루프트 한자 여객기를 60여명의 일반승객과 함께 타고 일곱곳의 경유지를 거쳐 28시간만에 서독에 도착했다.
국빈방문이었지만 朴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초라했다.
연도에 걸린 태극기는 스무개 남짓. 숙소인 스위트룸은 10평도 되지 않았다.
약소국의 설움을 절감해야 했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준 대가로 서독으로부터 얻은 차관은 4천만달러. 귀국한 朴대통령은 눈에 불을 켜고 수출문제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당장 수출진흥회의를 만들어 관계장관들과 경제4단체장을 참석시켜 매달 수출문제 전반을 검토케 했다.
첫 회의는 65년 1월 열렸다.
朴대통령은 79년 10월 사망 때까지 이 회의를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