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조선땅 각서받아낸 안용복은 노비 출신

중앙일보

입력 199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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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숙종때 민간인 신분으로 일본과 외교담판을 벌여 도쿠가와 막부(幕府)로부터 울릉도.독도가 조선영토라는 각서(서계)를받아냈던 안용복(安龍福)의 신상을 밝혀주는 요패(腰牌)기록이 3백년만에 일본에서 발견됐다.
본사 『시사월간 WIN』취재팀이 안용복의 행적(『WIN』5월호 게재)을 추적하는 일본현지 취재중 발굴한 이 기록은 그의 두차례에 걸친 일본행중 1차 도일(1693년)당시 소지했던 요패의 내용을 일본측이 옮겨적은 것으로 불분명했던 그의 신분과 호적상 이름.나이.신장.거주지 등이 확실히 드러났다.
그동안 안용복은 관련 사료가 적어 그 신분조차 경상좌수영에서복무했던 「능로군(전선의 노를 젖는 병졸)」출신 정도로만 전해왔는데,요패는 그가 동래(東萊)출신이며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의 사노(私奴)라고 출신을 밝히고 있다.이름도 그의 신분을 말해주듯 성(姓)없이 「용복(用卜)」으로만 표기돼있다.요패를 발급받은 해로 보이는 경오(庚午.1690)년 당시33세로 나타나 1657년 정유(丁酉)생으로 추정된다.
요패 이면에는 그의 주거지를 「부산 좌자천(佐自川)1리 14통3호」로 밝히고 있는데,이곳은 당시 초량왜관과 가까웠던 부산포 근처로 지금의 부산시좌천동 일대다.요패에는 이밖에 안용복의키가 「4척1촌」이고,『얼굴색은 검고 약간의 마 마자국이 있다』고 적혀있다.
이 요패기록은 당시 안용복의 행선지였던 인백주(因伯州)가 오늘날 행정구역안에 편입돼있는 돗토리(鳥取)현립박물관에 보관중인데,19세기초 지방역사가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의 저술 『죽도고(竹島考.사진)』하권에 실려있다.
서울대 최승희(崔承熙.국사학과)교수도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정남(丁男)이라면 누구나 소지했던 호패(號牌)와 달리 요패는 군인들이 지녔던 일종의 신분증명』이라며 『당시 안용복은 천민신분으로 수군에 복무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 다.
안용복은 조선조의 공도(空島)정책에 따라 비워둔 울릉도에 왜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두차례나 울릉도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관리들과 담판을 벌이고막부로부터 이들 두섬이 조선영토임을 확인했지만 조선조정은 거꾸로 범경죄(犯境罪)를 저질렀다 하여 귀양보냈던 인물로,오늘에 와서야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김홍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