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00곳에 미술관 기증하는 괴짜 경영학자
이미 60곳에 들어선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안동 시내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 안에 안동 강남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49번째 '학교 안 작은 미술관'이 설치된 곳이다. 지난달 17일 오전 이곳을 찾아가는 길에 황의록 한국미술재단(KAF) 이사장이 동행했다. 그는 하루 전 새 미술관 설치 협의를 위해 전북 군산에 출장을 다녀왔지만 “좋은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며 먼 길을 마다치 않았다.
한국미술재단(KAF), 초등학교 10%에 작은 미술관 조성 사업
학교 리모델링 하며 그림 18점씩 기증, 학기마다 순환전시
평가 통과한 소속 작가에 전시 기회, 해마다 해외여행도
다음 사업 구상은 화가들의 그림 보관 고민 해소할 수장고
학교 리모델링 하며 그림 18점씩 기증, 학기마다 순환전시
평가 통과한 소속 작가에 전시 기회, 해마다 해외여행도
다음 사업 구상은 화가들의 그림 보관 고민 해소할 수장고
학교가 장소를 제안하면 황 이사장과 재단 관계자가 직접 내려가 확인한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이들이 언제든 볼 수 있는 개방적인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치 장소가 결정되면 가벽과 조명 공사 후 재단 소속 작가 그림을 무진동 차량에 싣고 가 걸게 된다. 긴가민가했던 학교 관계자들은 도착한 그림 수준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한다. 그림값과 공사비까지 학교당 5000만원가량이 들어간다. 이미 30억원 이상 지원한 셈이다.
그림은 학교에 걸리지만, 소유권은 교육청에 넘기고 있다. 교육청 주관으로 학기마다 한 번씩 작품을 순환시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학교는 관리 부담을 덜고, 학생들은 졸업하기까지 12세트, 200점 이상을 보고 졸업할 수 있게 된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초기엔 학교가 마련한 공간 크기에 맞췄던 기증 그림 수도 18점으로 고정했다.
안동 강남초는 작은 미술관 반대쪽 복도를 학생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이 학교 학생 대부분이 한 점씩 그린 그림에 유약을 바르고 구워 타일처럼 벽을 장식한 것이다. 방과 후 수업에서 그린 작품을 담은 도록도 냈다. 넘겨보니 학생 작품치곤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학교 이경순 교장은 “미술 교육을 교과서로만 하다 보면 실감이 나지 않는데, 명작을 직접 보면서 아이들도 색감과 구성 등 심미적 수준이 확실히 높아지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미술 작품 하나로 세상을 따뜻하게’란 재단의 구호가 실제 구현되는 현장을 보며 황 이사장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일을 왜,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는 역시 한국미술재단, 카프에서 시작한다.
화가 후원자 조합에서 미술재단으로
카프는 ‘소속 작가’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카프의 전신은 한국화가협동조합. 그런데 조합원은 화가가 아니었다. 아주대 경영대학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 정통 경영학자 황의록 교수가 지인들에게 "날릴 셈 치고 딱 3년만 화가들을 돕자"고 설득해 만든 후원자 조직이었다.
그는 IBRD 장학생으로 미국서 학위 따고 돌아와 아주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창의적 수업과 수많은 기업 컨설팅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가난했던 유년시절 동안 문화적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 심리적 위축감으로 오래 남았다고 한다. 소설과 클래식 음악, 그림이 탈출구였다. 특히 미술의 경우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시간을 쪼개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 화가의 아틀리에까지 방문했다. ‘패스트 팔로워’ 신세를 막 벗어난 한국 경제가 앞으로 더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력인데, 그림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카프의 소속 작가 선발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최소 3년간 4단계의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우선 블라인드 테스트. 지망하는 작가는 포트폴리오 10장만 내면 된다. 재단은 이름 등 식별 표지는 모두 암호화한 뒤 심사한다. 심사위원도 비공개고 평가도 집에서 한다. 그림만 보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해야 살아남는다. 그다음은 작업실 점검. 한국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며 발전이 있는지를 본다. 여길 통과하면 ‘등록작가’로 받아주고 함께 작품활동을 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동료평가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기존 소속 작가 전원이 동의해야 최종 관문을 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해 2~3명씩 선발한 소속 작가가 31명(1명 작고)이다.
소속 작가에게는 연 1~2회 아트버스 카프 갤러리 전시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대관료는 없다. 대신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미공개작을 걸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전속작가와 달리 소속 작가는 다른 곳에서 전시나 출품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게 재단의 제1원칙이다.
미술과 경영이 만나면
'학교 안 작은 미술관' 기증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그는 또 다른 사업을 기획하고 있다. 수장고 사업이다. 화가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림 보관할 곳이 없다는 고민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열심히 그리는데 당장 팔리지는 않고, 그렇다고 작품을 버릴 수도 없어 끌어안고 있다가 나중엔 작업실에 딱 손바닥만 한 공간만 남고 온통 작품으로 가득 차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걸 재단이 모아 관리해주는 일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커피값 정도만 받고 짧은 기간 대여를 해주는 방식도 고려 중이다. “시민들은 적은 부담으로 작품을 향유할 기회를 갖고,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곁들인다. 그 수익을 수장고 운영에 쓰면 일석이조다. 그야말로 경영학자다운 발상이다.
※기사 취재에 심혜주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