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를 자임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카터 앞에 숱한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교안보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1973년 봄 미군은 5만8220명의 전사자를 내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미국의 위상은 최악이었다.
그해 가을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로 진격했다. 과거 일방적 패배를 맛보았던 이집트군은 놀라운 변신을 선보였다. 전략적 요충지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을 격퇴했다. 1970년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의 실용적 군 개혁이 빛을 발했다.
카터는 실용주의자 사다트를 설득해 미국으로 초청했다. 새로 집권한 이스라엘의 우파 베긴 총리의 마음도 움직였다. 1977년 가을 세 사람이 한적한 대통령 별장에 모였다. 격의 없는 대화가 열흘 넘게 진행됐다.
난상토론 끝에 가까스로 합의에 이르렀다. 중동평화의 로드맵을 담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사진)이 탄생했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실사구시 정신이 맺은 성과였다. 두 나라 사이에 오랜 평화를 가져온 귀중한 합의였다. 사다트와 베긴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카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경제를 좀 먹는 고물가를 퇴치해야 했다. 백악관에 물가안정을 책임질 ‘인플레이션 차르(czar)’ 직책을 신설해 코넬대 교수 알프레드 칸을 그 자리에 앉혔다. 더불어 초강성 매파로 꼽히는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임명해 물가 잡기에 힘을 실어줬다.
1980년 볼커는 기준금리를 20%로 올렸다. 그러자 고삐 풀린 물가가 서서히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해묵은 전쟁과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에 큰 공을 세웠지만 정치적 대가도 컸다. 고금리로 경기가 침체되자 사다트는 암살됐고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다.
작년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란도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중동은 또 화약고가 되었고 국제유가가 들썩였다. 유럽과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고 물가를 안정시킬 리더십이 절실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연 지미 카터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페드시그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