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주목 받는 후성유전학 연구
유전자가 모든 것 결정하지 않아
같은 유전자라도 다르게 발현돼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변하기도
유전자가 모든 것 결정하지 않아
같은 유전자라도 다르게 발현돼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변하기도
유전자 ON·OFF 스위치
따라서 우리의 몸이 제 기능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유전자들을 적절히 선별해 발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 유전자의 선별적 발현을 조절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DNA의 메틸화(methylation)와 DNA와 결합된 히스톤 단백질의 아세틸화(acetylation)이다. DNA의 메틸화란 DNA를 구성하는 네 종류의 염기 중 시토신과 구아닌이 연달아 나타나는 부위에 메틸기(CH3)를 붙이는 것이고, 히스톤 아세틸화란 히스톤 단백질을 구성하는 라이신에 아세틸기(CH3CO)를 붙이는 것이다. DNA에 달라붙은 메틸기는 OFF 스위치처럼 작동해 유전자의 발현을 막고, 히스톤에 붙은 단백질은 ON 스위치가 되어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한다. 각각의 세포들은 특성에 맞게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적절히 사용해 자신에게 꼭 맞는 형태로 살아간다. 이 밖에도 마이크로 RNA의 생성, 히스톤 단백질 메틸화 등 다양한 유전자 조절 스위치가 존재해 각각의 세포들은 각자 입장에 맞는 ‘적절한’ 세포로 다듬어진다. 유전자를 활성 또는 비활성하는 스위치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이 스위치들이 얼마든지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이 유전자 스위치의 변화를 촉발하는 건 환경적 요인이다. 그중 하나가 노화다. 나이가 들수록 평균적으로 DNA 메틸화가 줄어든다. DNA 메틸기는 유전자를 끄는 스위치이므로, 이들이 사라지면 이전에는 기능하지 않았던 유전자들이 깨어나는데, 이들 중에는 암 유전자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통계적으로 암 발생률이 높아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밖에도 흡연·음주·약물·굶주림과 폭식, 각종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들은 유전자 조절 스위치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애초에 가진 유전자 자체의 이상이나 변화가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 패턴과 정도가 달라지며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후성유전학(epigenetic)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대로 이어지는 후성유전학적 변화
학자들이 후성유전학을 주목하는 건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당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 유전학에서는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밝은 피부의 사람이 햇빛을 많이 받으면 피부세포의 멜라닌 합성 기능이 강화되어 피부색이 어두워지겠지만, 그것이 장차 태어날 자손의 피부색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식세포가 만들어질 때, 대부분의 후성유전학적 표지들은 지워진다.
그러나 모든 후성유전학적 표지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임신한 암컷 쥐(1세대)를 굶기면 뱃속에서부터 영양실조 상태에 놓인 새끼쥐(2세대)는 DNA 메틸화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들은 이후에 먹을 것이 풍족한 상태에 놓였을 때 당뇨나 비만과 같은 대사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후성유전학적 각인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인이 나타난 2세대 쥐들에게서 태어난 3세대 쥐들은 굶주림 상황에 놓인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조군 쥐들보다 대사질환의 발생 위험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후생유전학적 각인 중 일부는 대를 이어 전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비슷한 일은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전쟁으로 인해 극도의 영양실조에 장기간 노출되었던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은 최대 4세대까지 대사질환에 관련된 후생유전학적 각인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가혹한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는 유전자에 상흔을 남기고, 그 흉터가 지워지는 데 몇 세대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대처하기 힘든 유전자 돌연변이에 비해, 후생유전학적 각인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환경 개선을 통해 얼마든지 사전에 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