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효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아내 신분 따라 자녀들 신분 갈려
육순의 공신 황효원 간절한 호소
성종은 “정리 따져 처로 인정해야”
사헌부 “난신의 딸” 물고 늘어져
처 둘 금지 처첩분간법 역폐단
정치는 유능했지만 오만·탐욕
육순의 공신 황효원 간절한 호소
성종은 “정리 따져 처로 인정해야”
사헌부 “난신의 딸” 물고 늘어져
처 둘 금지 처첩분간법 역폐단
정치는 유능했지만 오만·탐욕
사헌부·사간원 한 달간 왕 흔들어
15세기 조선사회를 달군 핫 이슈는 처첩분간(妻妾分揀), 즉 누가 정실이고 누가 측실인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들은 신유학적 가족 이념에 따라 처첩 및 적서의 제도화를 추진하는데, 그들 사이에 일종의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국 20년 태종 13년에는 “예에는 처가 둘 일수 없다”(禮無二嫡)는 유교의 혼인관을 따라 일처(一妻) 외는 모두 첩으로 논정(論定)하는 ‘처첩분간법’이 발효되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누리던 동등한 권리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강등되거나 박탈되는 법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귀족이나 사족의 경우 특히 민감하여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어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가 첩이 아닌 처임을 증명하기 위해 혼서(婚書)와 예장(禮狀) 등의 자료를 제출했지만 대간들의 교묘한 언술에 걸려 보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의 두 번째 아내 임씨도 첩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쯤에서 한 집안을 가루로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덤비는 대간들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당시 임씨 소생의 두 아들 황석경과 황준경은 생진시(生進試)와 한성시에 응시 원서를 제출했는데, 서자일 수 있다며 보류된 상태였다. 논정에 돌입하자 예조에서는 임씨의 혼서(婚書)와 공신록에 아들들이 적자로 기록된 사실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양사는 황효원의 혼인 생활을 염탐하고 한성부 장적까지 샅샅이 뒤져 한 가족을 능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황씨 가의 쟁송 법정다툼 번져
한편 이쪽저쪽의 말을 다 듣고 난 왕은 “임씨를 황효원의 후처로 논정한다”고 판결한다. 그럼에도 대사간은 물고 늘어지며 황효원의 두 아내를 다시 조사할 것을 건의한다. 왕은 “나는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고집스러운가”라고 하며 법과 인정은 서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 왕이 두 번의 혼인에 많은 자식과 손자까지 둔 노년의 최한정에게 인생의 원리를 가르치는 형상이다. 황씨 가의 처첩 논정이 시작되기 2개월 전, 5품 교리이던 최한정은 몇 단계를 뛰어넘어 당상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덕망과 재능이 검증되지 않은 자라며 임명을 철회하라는 비판이 거세었다. 무능함을 상쇄할 기회로 무리수를 둔 것인가, 아니면 뒤틀린 심사 때문인가. 아니나다를까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 처첩논정을 기획하여 사건을 주도해 간 것 외에 별다른 업적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 임씨가 후처로 논정되고 아들들이 사족의 일원으로 제자리를 찾자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의 첩 논정을 상고해 줄 것을 건의한다. 즉 이씨는 아비의 죄로 노비가 되었는데, 그녀의 외가와 자신의 집안이 연족(連族)인 관계로 공신이 된 자신에게 배정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줄곧 외가에서 살았는데, 늙은 홀아비가 된 아들의 배우자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어머니와 이씨의 외조모가 함께 도모한 일로 이 혼례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신의 자녀는 출생 전 외조(外祖)가 범한 죄로 사족과 혼인을 맺지 못하니 신의 자녀가 인류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왕은 노대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며 이씨를 다시 후처로 논정했다. 조정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대간들의 집요한 공격이 두달 간 지속되면서 이씨는 다시 첩이 되었다. 훗날 중종 2년에는 황효원의 외손자가 서출이라며 관직 제수가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사위 박영문은 처모 이씨의 사건을 담은 『적첩상고일기초(嫡妾相考日記草)』를 제출함으로써 이씨의 딸 황씨는 박영문의 정실로 논정된다.
100차례 조정회의 국정 마비 지경
황효원의 나이 63세, 성종 7년 5월 2일에 시작된 ‘황효원 처첩논정’은 성종 12년 9월 19일 68세의 황효원이 “피를 토하며 죽은” 후에야 끝이 났다. 그가 죽은 이후 재개된 적서 논쟁은 치지 않더라도 5년이 넘도록 100여 차의 조정회의를 잠식하며 국정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태산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가 좁아져 허리띠가 되도록(山礪河帶)”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라는 왕의 교서를 받은 상산군 황효원(1414~1481), 그 노년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유능했지만 사람을 오만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점이 있었고, 재산 증식에 재능이 있어 화가옹(貨家翁)으로 불리었다. (『황효원졸기』) 그의 인생이 이후 역사에 던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