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D-6일, 여당서 쏟아지는 대통령 사과 요구
2013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오바마 케어(건강보험 개혁)가 웹사이트 장애를 일으켜 혼란과 비난이 빗발쳤을 때다. 오바마는 TV로 중계된 백악관 로즈가든 연설을 통해 “내 책임이다. 문제 개선을 위해 24시간 노력하고 있다”며 공식 사과했다. 그의 재빠른 사과로 정치 쟁점화를 노리던 공화당은 그만 공격의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같은 해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참사 때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바로 사과했다. 장관이나 실무자들을 비난하지도,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윤 대통령, 이태원·엑스포 사과
변화된 행동 이어지지 않아 실망
“성난 국민 감정 다독여줬어야”
사과 요구 높을 때가 사과의 적기
변화된 행동 이어지지 않아 실망
“성난 국민 감정 다독여줬어야”
사과 요구 높을 때가 사과의 적기
굳이 대통령이 나설 일일까 싶은 것까지도 공개 사과의 정공법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모습은 책임 인정에 인색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피해 당사자와 직접 소통해 문제를 해결한 사례는 경영학 서적에 등장할 정도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공습으로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의 의료진·환자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른 대처로 분쟁이 확산하는 걸 막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오바마는 직접 의사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여기자에 말실수한 뒤 사과 메시지 남겨
어떤가.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면 불쾌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무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인간미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는 데 사과의 힘이 있다.
저자들은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가 됐다고 소개했다. 과거 권력자는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권위와 지도력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사과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하던 ‘루저의 언어’였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사과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됐다.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신뢰가 쌓이면서 갈등과 분쟁 조정이 수월해진다. 공감을 이끌어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정치력이야말로 리더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일 것이다. 그러니 사과를 하는 게 패자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하는 리더가 21세기엔 패자가 된다.
YS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
사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선 되지 않는다.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할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충분조건이란 ①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②피해를 준 데 대해 책임을 지며 ③변화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사과에 대하여』의 저자 아론 라자르는 강조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차남 김현철씨의 한보 특혜 연루 의혹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1997년 2월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국민 앞에 사과했고, 얼마 후 현철씨는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저서 『김영삼 재평가』에서 “검찰에 진상조사를 주문했지만 이렇다 할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YS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현직 대통령 아들을 봐준 수사 결과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별건 수사를 통해 차명 보관 중인 정치자금을 발견했다. 한보 특혜와는 무관했지만 민심을 돌리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YS는 아들의 구속을 지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두 아들이 사법처리되는 비운을 겪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2002년 기자회견을 열어 “제 자식들 문제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친 데 대해, 죄송하고 슬픈 심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제 자식들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받는 데 조금도 이의가 없다”며 고개 숙였다. “친·인척 감시에 소홀했던 점을 반성한다”며 제도 개혁도 지시했다.
YS·DJ의 경우는 성공한 사과라 할 만하다. 사과의 ‘표현’뿐 아니라 재임 중 아들을 구속하는 구체적 ‘행동’이 뒤따르면서 국민이 진정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통해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조언한 라자르 교수의 지적대로다. 정치인,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 사과는 고도의 정치 행위인 것이다.
“오만과 독선 보인 데 대해 사과해야”
돌아보면, 윤 대통령이 사과를 안 한 건 아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 집중 호우 등 고비마다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하자 대국민 담화를 내고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왜 국민은 윤 대통령이 사과에 인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윤 대통령으로선 혹평에 서운할 수 있겠으나, 사과의 수용 주체인 국민의 입장에선 변화된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말뿐인 사과’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 엑스포 실패로 사과하긴 했지만 실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책임져야 할 관료들을 되레 영전시키는 일이 벌어지니 납득할 수도, 사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아닐까.
아리송한 디올백 논란 사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는 여권 내에서도 논란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을 선물한 목사가) 자꾸 오겠다고 해서 그거를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책임을 인정한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한 화법이다. “일관된 원칙과 잣대는 제 가족, 제 주변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던 후보 시절 발언과도 180도 다르다. 설치를 검토한다던 제2부속실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게다가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김 여사의 약속도 식언이 돼버리면서 국민은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권이 사과에 인색한 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트라우마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최순실과의 연관 고리를 쉽게 인정하는 바람에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줘 결국 탄핵에 이르렀다는 후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과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공멸을 막을 정치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표류하며 시간을 허비한 정치력 부재 탓이 크다. 엊그제 로이터통신은 김 여사가 지난해 12월 15일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게 “김 여사가 부정적 논평으로부터 여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해설 기사를 게재했다. 뼈아픈 지적이다.
100% 완벽한 정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사과의 기술, 즉 정치력에 달렸다. 쇠도 달궜을 때 치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게 타이밍이다. 상대가 들을 자세가 돼 있을 때 진정성 담긴 사과를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사과 요구 높은 지금이 바로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