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유서를 남긴 그의 죽음이 불온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건 아닌지. 온당한 애도가 아닌, 산 자들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 감정표출과 ‘정의의 사도’를 표방하는 새된 목소리들이 넘친다. 임 교수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쉽게 정죄하면서 오인한다. 남을 나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로 판단한다.”
슬픔은 분노와 망각이 아닌 슬픔과 애도로 맞아야 한다. 눈물이 날 땐 눈물을 참는 게 아니라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우는 게 맞다고 황 작가는 전한다. “울고 싶은만큼 울어도 돼”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을 독자들이 여럿일 것 같다.
죽음부터 일방적 이별까지, 여러 얼굴을 한 상실은 삶의 일부다. 갓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괜찮은 슬픔(Good Grief)’엔 “슬픔을 회피하는 건 곧 사랑을 회피하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 상실로 인한 슬픔을 잊으려 발버둥 치는 건 곧 삶에 대한 사랑에 눈을 감는 것이 된다는 의미 아닐까. 상실과 슬픔을 온전히 느낀 뒤 삶의 다음 장(章)으로 넘어가는 게 순리라고 동서고금 철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상실의 슬픔은 용기 있게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거울을 건네준다”고 했고,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지금 한국에서 인기몰이 중인 ‘매운맛’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의 말도 참고할 만하다. “행복은 환상”이라 설파했던 그는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봐야 한다”고 했다. 죽음은 그 자체로 애도하면서도, 무의미해 보이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게 우리 시시포스들이 굴려야 하는 돌덩이가 아닐까. 고 이선균 배우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