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두 차례 오일쇼크와 이에 따른 경제침체를 겪으며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국들은 무역장벽으로 위기에 맞섰지만, 각자도생은 저성장을 지속하게 했을 뿐이다. 1980년대 중반에 장벽을 없앴고, ‘1992년 단일시장 완성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 따라 회원국들은 시장개방과 치열한 경쟁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회원국 간 국경 철폐로 상품과 서비스,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혹은 내부시장)’ 완성에 점차 다가섰다.
그런대로 작동하던 단일시장은 위기 때마다 조금씩 왜곡됐다. 2019년 팬데믹 발발 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EU의 보조금 지급 규정이 느슨해졌다. 미국의 친환경산업 보조에 대응하느라 EU도 국가별 청정산업 지원 확대를 허용했다. 내부시장을 지탱하던 단일시장 규칙이 훼손된 것. 우크라이나 전쟁과 2050년 ‘넷제로’ 달성(그린딜) 등 산적한 현안에 묻혀 유럽의 경쟁력 강화는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위기 때마다 왜곡된 단일시장을 제대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내부시장 운영을 감독하는 EU 집행위원회가 팬데믹 관련 보조금을 이제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린딜 지원도 공정한 경쟁 속에 이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 시장의 완성이다. 회원국별로 디지털 시장이 분절된 바람에 시민들은 다른 회원국의 인터넷 쇼핑 이용이 쉽지 않다. 지난해 11월 발효된 디지털시장법과 디지털서비스법은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 규제와 콘텐트 감독 강화가 목표다.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EU 차원의 기틀을 마련해줘야 디지털 시장이 형성되고 운영될 수 있다.
내년 12월 1일 취임하는 신임 EU 집행위원장의 최우선 정책은 유럽 경제의 재도약이 될 듯하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국제정치경제 환경에서 유럽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경제 재도약이 필수다. 성장이 없다면 유럽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 규제 권력도 빛을 잃어갈 것이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국제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