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키워드는 두 개, ‘시장’과 ‘글로벌’이었다. 보고서는 모든 경제 정책 결정에서 시장을 중심에 두고, 세계 경제와의 동반 성장 체제를 구축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권력층의 주류 사조였던 자유주의, 국제주의가 반영됐다. 리커창이 꿈꾸던 2030년 중국의 미래 모습이기도 했다.
창업, 혁신 붐이 일었다. 중국은 어느 다른 나라보다 먼저 인터넷 쇼핑을 정착시켰고, ‘인터넷 택시’를 도입했다. ‘베이징에서는 거지도 위챗으로 구걸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그즈음이다. 마윈(馬云)이 당시 세계 최고가로 알리바바를 뉴욕 증시에 상장한 것도 2014년 9월의 일이다. 인터넷 혁명으로 시장은 활력이 돋고, 기업은 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커창 경제’는 바로 그 시간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다. 그해 6월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의 경제 관련 최고 협의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中央財經領導小組)가 열렸다. 소식을 전한 신화통신 보도에 뭔가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관행적으로 총리가 맡아오던 소조 조장에 ‘시진핑(習近平)’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경제 권력은 빠르게 시진핑 일인(一人)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진핑 세상’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리커창의 ‘대중 혁신’ 대신 국가가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하는 신형 거국체제가 강조된다. 민영기업보다 국유기업에 돈이 몰리고, 글로벌 협력보다 자력갱생이 중시된다. 당(黨)을 앞세운 시진핑의 10년 통치에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 정계에 자리 잡았던 자유, 국제주의 사조는 명맥이 끊길 처지다. 대신 ‘중화 권위주의’가 그 자리를 채운다. 리커창의 죽음은 그렇게 자유, 국제주의의 사망과 맥을 같이한다.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