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가정폭력에 이어 조폭까지 다루는 영화는 2시간 넘게 피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화란(禍亂·재앙과 난리)’이다.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됐는데, 당시 ‘HOPELESS’ (절망적인)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나면, 연규가 그의 이상향인 ‘화란(和蘭)’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지옥 같은 현실 속 소년에게 희망이란 게 있을까. 영화가 관객에게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화란’을 통해 장편에 데뷔한 김창훈 감독은 지난달 22일 언론 시사회에서 “폭력적 환경이 한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했다. 누아르 영화보다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규를 연기한 배우 홍사빈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을 앞둔 26살 신예다. 불우한 10대 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단편영화와 드라마 ‘방과 후 전쟁활동’(티빙), ‘무빙’(디즈니+) 등에서 모습을 비췄지만, 장편영화 주연은 처음이다. 신인 같지 않은 연기력으로 관객을 연규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괴물 신인’이란 찬사를 받는 이유다.
지난달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제가 잘 가꿔줄 수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욕심에 연규라는 인물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캐릭터 표현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참고하는 등 캐릭터 연구에도 골몰했다고 했다. 그는 “직접 표현하기보다 절절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보여 주는 게 좋은 연기라고 생각한다”며 “연규 캐릭터도 그렇게 나타내기 위해 그동안 찍었던 영상을 많이 보고, 거울 앞에서 여러 표정을 짓는 등 저 자신에 대해 많이 연구했다”고 말했다.
송중기, 김종수, 정만식 등 선배 배우들이 그런 그를 믿고 기다려줬다고 한다. 그는 “저 같은 신인에게 그렇게 많은 테이크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신 그 현장은 정말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을 연기한 송중기에게 아주 고마웠다고 했다. 그는 “자기 소리를 못 내는 연규에게 치건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송중기 선배 역시 현장에서 내게 그런 존재였다”고 말했다.
“(송중기) 선배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너 편한 대로 하라’였다”며 “극 중 치건과 매운탕을 먹는 장면이 있는데, 마지막에 애드리브로 했던 ‘고맙습니다’라는 연규의 대사는 100%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뒷이야기도 전했다.
그는 첫 장편으로, 그것도 데뷔 5년 만에 칸에 입성했다. “칸은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했다. 바짓단이 접힌 채로 레드카펫에 올라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는 그는 “충분히 즐기지 못해 꼭 다시 가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연기를 향한 단호한 마음가짐도 드러냈다. “칸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아닌 것 같다”며 “운이 좋아 감사한 타이틀과 기회가 주어졌지만,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뿐 아니라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 배우 문근영이 이끄는 ‘바치 창작집단’ 연출부에 몸담고 있고, 대학로에서 꾸준히 연극 연출도 한다. 그는 “배우가 꿈이었지만, 큰 틀에서 창작자로서 활동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당장 11월 대학로에서 열릴 연극 ‘소공녀’를 준비하고, 기말고사를 잘 보는 게 목표”라는 포부를 묻자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은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혜택을 보는 면도 있지만, 나중에도 역할마다 어울리는, ‘그럴싸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