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법원장이 될 경우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우선적으로 재판지연 문제를 들여다볼 작정인가 보다. “충실하고 신속한 재판이 이뤄지도록 활력을 불어넣겠다”고 했다. 현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한 2017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1심 판결이 2년 안에 나오지 않는 장기 미제 사건 수가 민사소송의 경우 3배, 형사소송은 2배 정도 늘었다. 오히려 판사 1인당 업무부담은 줄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걸 고려하면 사건이 늘어서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27조 3항)고 규정한다. 하위법들도 민사소송은 1심 및 항소심 모두 5개월 이내, 형사소송은 1심 6개월 이내 및 항소심 4개월 이내에 재판을 마치도록 하고 있다. 지체된 정의, 그리고 침해받는 권리 앞에 이런 헌법과 법률 규정 자체가 무색하다.
많은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가 폐지되고 법원장 추천제가 시행되면서 재판지연이 심화했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해 성과를 인정받으면 승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줄고, ‘후배들에게 밉보이지 않아야 법원장이 될 수 있다’는 인기영합적 분위기가 퍼졌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데도 24일 퇴임하는 김 대법원장은 “법관이 예상만큼 충원되지 못했고 경력 법관들이 배석판사로 들어오면서 사명감과 열정만으로 일하게 하긴 어려운 상황이 됐다”(8월 31일 기자간담회)고 했다. 코로나 사태도 한 원인이었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시행한 제도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최근 서울중앙지법 기업 전담 재판부 4곳에 ‘장기 미제 중점 처리 법관’ 2명을 추가로 배치한 모양이다. 예전에 없던 일로, 재판지연에 따른 비판에 대응하는 임기 마지막 생색내기란 평가가 나온다.
이균용 후보자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 그가 공개 발언이나 기고문 등을 통해 가장 강조한 것은 법의 지배만을 받을 수 있는 법관의 사명감과 정치적 중립이다. 후보자로 지명된 후 첫 공개석상에서 “무너진 사법 신뢰와 재판의 권위를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현 법원 상황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개선 의지를 함축했다. 그는 재판지연의 원인을 다각적인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주변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히드라’에 비유했다고 한다. 머리가 9개나 되는 데다 잘라도 머리가 계속 재생하는 이 괴물처럼 여간해서는 해결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다.
대법원장 후보가 본 재판지연
머리 계속 솟는 ‘히드라’에 빗대
독일·일본식 ‘신속한 재판’ 기대
머리 계속 솟는 ‘히드라’에 빗대
독일·일본식 ‘신속한 재판’ 기대
다른 제안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학계 일부에서는 민사재판에 미국식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원고와 피고는 각각 상대방에게 소송과 관련된 정보를 요청할 권리가 있고, 합당한 이유 없이 상대가 요청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으면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함은 물론 패소까지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전체 민사사건의 5% 정도만 정식재판까지 진행되고, 나머지는 사전 합의 처리된다.
법원행정처 역시 2021년부터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지난해 판사들 대상 설문조사에서 ‘재판당사자가 정보·증거를 투명하게 공유해 분쟁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에 응답한 법관 85.9%가 동의했다. 현실적으로 법관 수가 부족한데 사건이 밀린 재판부에 계속 판사들을 추가하겠다는 것보다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제도다.
이균용 후보자는 “사법부 앞에 놓여 있는 과제는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진단했다. 히드라를 제거한 헤라클레스 역시 조카인 이올라오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재판지연이라는 괴물과 싸우기로 작정한 이 후보자에게도 힘을 합할 우군이 많을수록 좋다.